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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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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32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7 - 3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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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공재 윤두서 관련 연구는 예술가로서의 면모와 그 성취를 드러내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외연을 떠받치고 있었던 생의 이면에 대한 연구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남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회인으로서, 장원을 경영했던 경제인으로서, 회화사에 큰 족적으로 남긴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던 생활인으로서의 공재의 삶을 재구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공재의 개인 문집인 『기졸(記拙)』을 바탕으로,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고산의 가르침은 「충헌공가훈(忠憲公家訓)」 속에 고스란히 남아 전하는데, 공재가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자신의 삶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은 이 가훈에서 『소학』을 중심으로 수신근행(修身謹行)과 적선행인(積善行仁)을 실천할 것을 주문했는데, 공재는 이를 완벽하게 체현했다. 공졸(恭拙)한 삶의 태도는 수신근행의 실천이었고, 진보적 노비관 및 실천적 애민의식은 적선행인의 결과였다. 공재가 당대의 세인들로부터 ‘어질고 도타우며 관대하고 넓은 덕’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되고, 해남윤씨가문이 공재 대에 이르러 명실공이 조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러한 실천적 삶에 기인함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위대함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공재의 삶과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 이 논문의 작은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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