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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6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73 - 213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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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의병기를 거치면서 통합군단 결성을 꿈꾸던 유인석은 의병전쟁의 근거지로 연해주를 선택했다. 그러나 한때 의병전쟁의 무대였던 연해주의 항일 세력은 분열을 겪고 있었으며, 애국계몽운동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투쟁 노선과 출신 지역을 둘러싼 갈등으로 분열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전국 의병을 하나의 지휘 체계로 묶는 통합군단을 구상하던 유인석은 노선이 다른 세력과 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 봉기를 위한 일에 헌신할 사람들을 모은 명단인 「의안」에 애국계몽주의자들까지 들어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노선을 달리하는 이들까지 끌어들이는 상황에서 유인석은 통합군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바람직한 나라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아도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나라가 아닐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합군단을 구상하면서 이를 통제하기 위한 핵심적 전위 세력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그 결과가 관일약이란 조직으로 나타났다. 관일약은 현실을 ‘나라’와 ‘도’와 ‘몸’과 ‘사람’이 망하는 상황으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성리학적인 가치 기준에서 규정한 이 네 가지 요소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로 꿰어야[貫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관일약은 성리학적 가치가 구현된 사회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서 애국계몽운동과 공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09년 7월에 출범한 관일약은 서북 지역에서 의병에 가담했던 이들, 유인석이 서북 지역에서 강학하면서 받아들였던 제자들, 연해주에서 새로 맞은 제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향약 조직의 형태를 본받았고, 정기적인 모임을 거치면서 강령을 읽고 신념을 다지며 국권 회복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관일약은 유인석이 기대했던 것처럼 성공하지 못했다. 요동과 국내 인사들까지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연해주 일부 인사들의 범주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계몽운동세력과 연대하는 것에 대한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게다가 통합군단을 출발시키자마자 조선이 병합되고, 신해혁명, 러․일간의 관계 강화 등 국제적 여건이 악화했기 때문에 관일약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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