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청은 조선에서 기존의 조공질서 대신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한 현실적인 방법으로 상공업을 통한 경제적 지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하고, 조선에 중국 상인의 진출을 장려했다. 그 결과 조선에서 화상 세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1882년 이후 1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화상이 조선에서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정부의 영향이 가장 컸다. 화상들은 어느 곳에서도 몇 개의 상점만 모이면 출신지 별로 자치 조직인 幫을 만들어 상호부조를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화상은 통일적이고 유기적 연결망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화상은 출신지역과 직업별로 분산되어 있었고, 籍貫에 따라 종사 직종이 서로 달랐으며, 幫끼리 교류도 별로 없었다.
개항기 조선으로 이주해온 화상들은 일부 대상점의 지점을 제외하고 거의 빈털터리로 출발했다. 조선 화상 가운데 상당수는 산동·하북성 등지에서 농촌인구 과잉으로 인한 생활고와 어지러운 정세를 피해 고향을 등진 이른바 난민들이었다. 이들은 고생을 각오하고 홀몸으로 조선에 건너와 각고의 노력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노력 외에 화상들은 점포 구입이나 상업거래에서 청 상무총서의 적극적인 보호와 보증을 받았다. 이것은 청의 영향력 확대와 화상의 세력 확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82년 이후 한중관계는 전통적·비공식적 관계에서 근대적·공식적 관계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조선상인·지방관과 중국상인의 마찰과 분쟁이 발생했다. 화상들은 개항장뿐만 아니라 내지에 들어가서도 상업활동을 했다. 내지 거래에서 화상들은 불법으로 개설한 점포를 중심으로 각 지방별로 일찍부터 조직된 자치 조직을 통해 한성·인천 등 개항장 상점들과 상품을 거래하고 시장 정보를 교환하는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했다. 화상은 조선 내지 각처에서 불법적인 활동을 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밀무역에도 종사했다. 조선의 주요 무역 품목이었던 인삼은 조선의 수출 금지품이었기 때문에 밀수출의 형태로 중국에 수출되었다. 인삼 밀수출은 청 상무총서의 방조 아래 이루어졌다. 화상들은 청 군함이 인천항을 왕래할 때, 군함을 이용해서 인삼을 몰래 수송했다. 또한 조선 후기 이후 중국 산동성과 황해·평안도 지역 사이에는 밀무역이 상시화 되어 있었다. 1882년 이후에는 인천, 한성의 화상 상점에서 중국 범선에 물건을 싣고 와 대동강 입구와 내지 각처에 나누어 팔았다. 1882년 이후 조선과 중국의 무역에 정식무역과 밀무역이 혼합되어 있었고, 전통적인 관례와 근대적인 조항이 혼재되어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공존하면서 때로는 충돌했다.
근대 이후 청과 조선의 무역과 밀무역은 이전 중국 상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화상의 상업활동은 서양 양행이 수입한 상품을 내지 또는 주변지역으로 분배하는 중개상 역할에 머물렀다. 이는 동남아에서 화상이 하위 수준의 도매·소매 등 상업망을 담당했던 것과 동일하다. 개항기 조선의 무역은 외국 양행→중국 대상인→화상→조선의 중개상 또는 소비자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항 초기 조선에서 화상들의 유통망은 일본·중국과 연결되었지만, 이것은 부분적인 유통망에 불과했다. 화상들이 동남아를 비롯해서 조선·일본에 광범위하게 진출하면서 화상의 유통망이 형성되었지만, 이 유통망은 고립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또한 근대 이후 서구 열강의 양행이 무역과 유통을 독점한 가운데 중국상인들은 양행의 하위 유통망을 장악했다. 화상들은 근대 네트워크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상업 중개방식을 따랐다. 달라진 것은 취급하는 상품에 서양에서 수입한 면포를 비롯한 공업제품이 추가되었다는 것뿐이다. 결국 조선 화상의 상업망은 청의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범위도 동아시아를 포괄하는 네트워크로 기능하지 못했으며, 조선 내에서도 제한적이고 고립적으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