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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83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 - 3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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蜀漢이 멸망한 뒤 曹魏를 찬탈하고 西晉을 개국한 무제 사마염은 孫吳를 정벌하여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했으나 뜻밖에도 서량의 반란으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서진의 군신들은 어느 누구도 서량을 평정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지만 유독 마륭이 자청하여 무제의 신임 하에 서량의 수기능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그해 서진은 동오를 공격하여 다음해 4월에 역사적인 천하를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서진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으나 그 중 하나가 마륭의 서량 평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것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마륭이 서량을 평정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이 바탕이 되었으나 그 바탕에는 제갈량이 남겨 놓은 팔진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갈량은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가 혁신한 팔진도는 촉한이 멸망한 시점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리품의 하나로 魏晉에서 입수되어 西晉이 천하통일을 달성하는데 기여하였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제갈량의 팔진도는 문헌으로 남겨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실존여부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촉한의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팔진의 유적이 몇 군데 전해지고 있었으며 夔州 어복강에 설치한 64개의 누석은 명나라 武宗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晉書󰡕에서는 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글을 陳勰과 마륭이란 인물을 통하여 제시해 주고 있었다. 진협의 행적에서는 팔진도가 치밀하고 신속정확한 지휘체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마륭의 행적에서는 편상거에서 弓弩를 쏘고, 木屋으로 적의 矢石을 피하며 싸우면서 전진하는 진법이란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마륭의 편상거에는 쇠뇌와 활을 포함한 병장기들을 배치하여 먼 거리에 있는 적은 쇠뇌를 사살하고 중․근거리에 있는 적은 활을 쏘았으며 근거리의 적은 병장기로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편상거 안에 8명의 병사들을 배치하여 4명은 방어를 시키고 4명은 공격하는 전법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케 하였다. 마륭의 西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제갈량의 팔진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첫째, 제갈량의 팔진도는 치밀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둘째, 제갈량이 손에 들었던 白羽扇은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한 도구였다. 셋째, 팔진도는 편상거를 중심으로 편성하였을 것이다. 넷째, 편상거에는 連弩를 설치하여 적과 접전시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했을 것이다. 다섯째, 편상거를 운용하는 인원은 8명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섯째 팔진도는 작전술이 아니라 전투상황에 구분없이 사용하는 전투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제한 등 여러 가지 한계점으로 인하여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였다. 제갈량이 혁신한 팔진도의 실체나 마륭의 서량 원정이 갖는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기에 이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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