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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93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337 - 36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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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시대를 거치면서 청나라의 정치구조는 재편되었고, 권력관계는 변화하였다. 정치구조는 권한이 축소된 황제, 행정을 장악한 총서, 그리고 일부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독무 등으로 재편되었고, 그에 따라 황제에게 집중되었던 권력도 분점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조재편과 권력관계변화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첫째, 황제권의 약화이다. 청나라는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었고, 그 방식에 의해 유지되던 왕조였다. 그런데 함풍시대를 거치면서 동치시대부터 권력이 분점되었다. 군기처가 총서에 의해 대체되면서, 중앙은 황제(서태후)라는 상징권력과 공친왕이라는 현실권력의 이중구조를 지녔다. 상징권력과 현실권력의 분리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황제가 공친왕의 임면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하관계는 분명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공친왕이라는 현실권력의 도움 없이 왕조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위기상황이 되면 공친왕에게 도움을 구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둘째, 만한관계의 변화이다. 1744년, 만주인이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은지 100년째 되던 해에 어사(御史) 항스쥔(杭世駿)은 “단 한명의 한인 총독도 없는” 상황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다시 100년이 지난 뒤, 만주인 관료와 장군들은 청영전쟁에서 민족 특유의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함풍시대가 되면 서로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던 공친왕과 쑤순은 둘 다 한인인재의 등용에 적극적이었다. 쑤순이 중용(重用)한 쩡궈판(曾國藩)·궈쑹타오(郭崇燾)·왕카이윈(王闓運)·쭤쭝탕(左宗棠) 등은 신유정변 이후에도 정치적 탄압을 받지 않았다. 이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가 재편되고, 황제·공친왕·독무 사이의 권력관계가 변화되었으며, 태평천국운동의 진압 과정에서 군사적 지분을 확보하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공친왕의 부상(浮上)이다. 함풍시대 이전 황위계승경쟁에서 밀려난 황자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았고, 어린 황제를 보좌하던 섭정왕은 죽은 뒤에도 처벌을 면치 못하였다. 공친왕은 청나라의 위기 때마다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친왕이 된 황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친왕이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함풍시대 이후 내우외환 속에서 황제권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열강에 대한 외교권과 지방의 군사권을 잃은 황제는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동치시대 이후 사실상의 황제였던 서태후도 외교권과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친왕을 파면했다가 다시 등용하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함풍시대 정치구조와 권력관계에 대해 더 분석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공친왕과 관료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이야기가 많지 않다. 그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정책이나 사건들은 많은 부분 상황에 의해 분석된다. 청나라 말기 역사전개에서 공친왕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해 그에 대한 분석의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함풍시대 이후 정국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공친왕의 역할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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