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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70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291 - 32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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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이래의 개혁 추진 사항 중에서도 경사대학당은 황제가 유달리 애착과 집념을 보인 개혁의 축소판이자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변이 발발하여 거의 모든 개혁 조치는 취소되거나 원상회복되었다. 그럼에도 경사대학당은 용케 살아남았다. 이글은 보수 반동으로 회귀하는 시대 상황에서 경사대학당이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배경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였지만, 정변 후에도 보수파는 황제와 강유위 일파의 주요 개혁 추진 사항인 경사대학당을 ‘떼내어야 할 혹’과 존재로 보는, 즉 폐지하려는 쪽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개혁의 상징이긴 해도 政體 변경과 같은 핵심 개혁사항과는 차이가 있는 사안으로서 보수파라 하더라도 무리하면서까지 긴급하게 결행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 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황제의 강한 애착과 집념이 깔려 있었다. 그러기에 정변 후 서태후의 압력 하에 작성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함과 동시에 여러 개혁 사항을 원상회복하라고 하는 조서에서까지 이를 특별히 언급하면서 ‘인재 양성’의 명분에서 존속을 명했던 것이다. 경사대학당이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폐된 황제의 처절한 저항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외국인 교습 초빙과 관련한 열강의 간섭 우려도 무술정변의 반동 속에서 경사대학당이 존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경사대학당은 개학을 위한 준비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운동 기간 중에 지원한 1천여 명 중 100여 명만이 입학시험에 참가한 것은 세태의 변화와 함께 그에 대한 당시인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었다. 찬밥 신세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500명을 정원으로 1899년 1월 18일 개학하였지만, 많은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개학 4개월 후인 1899년 5월 어사 吳鴻甲의 규탄 상소는 정원에 턱없이 모자라는 학생 규모와 그에 비해 과다한 교직원과 재정 규모, 낮은 성과를 겨냥하였다. 어사 오홍갑의 규탄은 경사대학당이 부실 운영된다는 시선과 학생의 집단행동에서 촉발된 것이긴 하지만 경사대학당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 특히 폐지 쪽이었던 보수파의 일반적 시선을 대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홍갑의 규탄에 단단히 화가 난 管學大臣 孫家鼐(이부상서)는 오홍갑의 규탄에 대해 실상도 제대로 모르는 비판이라 하면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경사대학당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감과 서로 상반되는 시선들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공방은 경사대학당의 속살을 드러내는 계기이기도 했다. 오홍갑의 규탄에 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경사대학당의 부실 운영 또한 사실이었다. 특히 정원에 턱없이 모자라는 200여명 정도의 재학생 규모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학생의 인적 구조였다. 대학에 해당하는 仕學院 학생은 20여명에 불과하고 중학생 150여명, 소학생 20여명의 인적 구조에서 볼 때, 당시 경사대학당은 “대학이라기보다 중학 중심의 기형적 대학”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당시 경사대학당의 실상이기는 했으나, 그 기형적 성격과 부실 운영이 경사대학당 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사대학당에 대해 갖는 당시인의 기대 혹은 일반적 시선의 결과였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어사 오홍갑의 규탄이 대학당을 폐지하려는 보수파의 시선을 대변한 것일 수는 있으나, 경사대학당의 부실 운영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 철폐를 요구하는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철폐를 위한 전초전이었을 가능성은 물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홍갑의 규탄 상소 후 2개월여가 지난 1899년 6월 말 혹은 7월 초 어사 熙麟이 경비 과다 지출을 규탄하면서 경사대학당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관학대신 손가내는 철폐가 불가함을 극력 피력함과 동시에 관학대신직의 사직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를 막으려하였다. 아마도 오홍갑의 규탄으로 1직급 강등되는 수모도 참아왔던 그가 이 단계에서 사직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보수파의 최종 목표가 경사대학당의 부실 운영의 개선이 아니라 그 철폐에 있음을 최종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8년 9월의 정변에서 1899년 7월까지의 1년여의 시기는 경사대학당이 생사를 왔다 갔다 하는 기로였다. 마치 미숙아의 힘겨운 생존투쟁과 같았다. 손가내의 사직 불사가 반드시 경사대학당 철폐 문제 때문이었다거나, 또는 그것이 경사대학당의 꺼져가는 생명을 연장시킨 극약처방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보수파의 철폐 기도에도 불구하고 경사대학당이 이 위기를 넘기고 존속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특별한 배경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러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위기를 넘기고 생명을 연장한 경사대학당은 이후 인적, 재정적 구조 조정을 거쳐 1900년 4월에는 정원을 500명에서 300명으로 축소 조정하고, 제반 경비 또한 정원 300명을 기준으로 책정 집행하게 되었다. 정원의 축소 조정은 경사대학당이 처한 현실의 반영이자, 경사대학당에 대한 조야의 따가운 시선의 결과였다. 그러나 어렵게 부지한 모진 생명은 보수파가 아니라 의화단에 의해 꺼졌다. 의화단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정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손가내를 이어 관학대신직을 맡은 許景澄(이부 우시랑)과 교습 1인이 의화단에 피살되고 교지는 외국 군대에 점령되었다. 허경징의 피살이 우연인지, 의화단의 의도된 결과인지는 앞으로 살펴 볼 일이다. 그 역시 경사대학당에 대한 중요한 시선의 일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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