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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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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7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25 - 147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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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탕평군주’로 알려진 영조는 18세기 조선을 이끈 대표적인 국왕으로 알려져 왔다. 본고에서는 영조가 추진한 대표적인 정책인 탕평책과 균역법이 그의 제왕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영조가 추진한 국정운영에서 대표적인 두 정책은 곧 그의 제왕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조는 바람직한 정치의 모델, 즉 제왕이 따라야할 전범에 대해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에게서 그 선례를 찾고 있다. 세종이나 성종, 선조가 나름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종을 크게 주목하였다. 세종을 주목한 것은 세종이 요순과 같은 군주이고, 자신 역시 이를 계승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의 이러한 논리는 학문적으로 요순과 같은 성인 군주가 스스로 될 수 있다고 자부할 만큼 열심히 공부한 학문으로 뒷받침되었다. 영조는 이전 조선국왕들이 경연에서 읽은 모든 책을 읽고 이에 더하여 다른 국왕들은 경연에서 진강하지 않았던 󰡔주례󰡕나 󰡔대학연의보󰡕와 같은 책들도 공부하였다. 이로써 수신의 영역만이 아니라 치국의 영역에 깊은 수양을 쌓게 되었다. 그 결과 영조는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영조가 어제(御製)의 책들을 만들어서 반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학문적 축적이 뒷받침되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한 방향은 크게 탕평과 균역으로 나타났다. 영조가 ‘탕평국왕’으로서 ‘군사(君師)’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또 국정운영에서 왕권으로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국가전례에서 전례개혁을 시도하고 그 결과를 󰡔국조속오례의󰡕나 󰡔속대전󰡕의 편찬으로 드러냈다. 국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통해 영조는 민을 중심에 놓는 정책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균역법이었다. 영조는 군사의 이상적인 군주로서 탕평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균역으로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이전의 질서를 넘어서서 왕-민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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