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古創新이란 점에서 보면 한중서예사에서 王羲之는 본받아야할 전형이면서 또 극복해야하는 대상이다. 조선조의 경우 추사 김정희의 서예에 대한 논의도 왕희지가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추사는 특히 東國眞體로 분류되는 서가들의 왕희지 추존에 대해 비판한다. 漢宋折衷論을 주장하는 추사는 우리나라 서가들의 왕희지 진적이 아닌 작품들을 통한 學書를 비판하면서 由唐入晉을 주장하고 아울러 北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비판은 일정 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추사의 비판이 타당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조선조 서예의 정체성 확립이란 측면에서 보면 일정 정도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동국진체 서가들과 관점이 달랐던 추사는 서예에서의 不易之典則을 강조하면서 동국진체 서가들을 비판한다. 추사는 法古創新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지만 동국진체를 비판할 때는 法古 쪽에 힘을 주고 있다. 문제는 이런 추사의 태도가 갖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동국진체의 眞자를 왕희지의 서체와 관련된 '晉'字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조선조 후기에 일어났던 ‘주체적 자아 회복’이란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는 ‘眞’字로 이해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동국진체 창시자로 알려진 李漵는 왕희지를 높이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隨時處變을 말한다. 이광사는 자신의 눈으로 내가 처한 현실을 주체적으로 이해하면서 天機를 강조하고 자연을 스승으로 삼는 예술정신을 펼치고자 하였다. 이광사는 결국 시대에 따라, 인물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서예는 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보았다.
동국진체 서가들이나 추사 모두 서예의 도를 찾고자 하는 것은 결국에는 동일하다. 왕희지를 존숭하는 것도 같다. 단순히 왕희지의 진적 유무로만 논한다면 추사의 견해는 일정 정도 옳다. 하지만 어떤 입장에서 서예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서예에 대한 견해는 달라질 수 있다. 왕희지를 추존하면서 단순히 왕희지를 모방하는 차원에 그쳤는가 아니면 한걸음 더 나아간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했는지는 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동국진체 서가들이 추구했던 것은 서예의 정법이란 무엇이며 왕희지가 추구한 서예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었지 단순 모방은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서예정신에는 한국서예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서나 이광사가 왕희지를 추존하지만 왕희지와 전혀 다른 서체를 통해 자신만의 서체를 완성한 것이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