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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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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8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31 - 15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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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전담한 인물이다. 전쟁 발발 전 일본 사신의 접대를 맡았던 그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華夷論에 근거하여 일본을 夷狄視하였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이덕형을 통해 강화협상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는 일본의 강화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명의 참전이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이 벽제관전투에서 패한 후 강화로 전쟁을 끝내려 할 때는 강화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명이 강화를 원하는 만큼 이를 피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전후 일본이 국교재개를 요청하자 이덕형은 국교재개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주역으로 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망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지 여부가 국교재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여겼다. 또 일본 보다 조선이 상위의 입장에서 국교재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덕형은 히데요시와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을 전쟁의 주역으로 여겼다. 또 조일관계에서 쓰시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전후 쓰시마 공격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국교재개에 앞서 쓰시마를 조선의 藩屛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전기의 조선과 쓰시마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전쟁 중 이덕형은 일본군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일정보를 탐색하였다. 전후 일본과의 국교재개에 있어서는 현실적인 외교노선을 택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일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존재였고, 조선 보다는 아래에 위치하는 국가였다. 즉 화이론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 한 대일인식 자체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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