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0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17 - 238 (2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는 재학 중인 유생들에게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라는 학생회가 있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장의(掌議)라는 직책이 있었다. 장의의 선출은 총학생회의 회의를 통해서 하였는데, 주로 생원들이 거재하는 동재의 유생들을 대표하는 동재장의와 주로 진사들이 거재하는 서재의 유생들을 대표하는 서재장의 등 독단적인 운영을 막기 위해서 복수제로 2명을 선출하였다. 성균관 장의의 교체는 춘추석전을 기준으로 임기 기한을 삼았으며, 특별한 상황에 따라 국왕의 특별한 교지가 있게 되면 즉시 교체하였다. 그런데 성균관 장의는 성균관 유생들뿐만이 아니라 서울의 4학 유생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매우 막중하고 영광스러운 위치였다. 그러나 항상 주목을 받는 영광스러운 위치였기 때문에 오히려 여러 가지 수난도 많이 당하였다. 아직 벼슬이 없는 전국 모든 유생들의 상소는 반드시 성균관 장의의 승인을 거쳐서 승정원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기능을 잘못 사용하거나 남용하였을 때는 벌을 받거나 정거를 당하였으며, 조정대신이나 국왕과 대립할 경우에도 많은 경우 정거를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거나 서인으로 전락 당하였고, 원점을 삭점 당해 과거응시에 불리한 처분도 받았다. 또한 특권을 부여 받아 단독으로 사용하는 방인 장의방에서 내쫓기기도 하였고, 절도(絶島) 즉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가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한 경우는 영거(永擧)를 당하거나 유적(儒籍)에서 이름이 삭적 당하는 치욕스러운 경우까지도 있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장의의 수난은 그만큼 학생으로서의 유생들의 지위가 약화되거나 성균관 교육이 대체로 부실해지거나 정쟁으로 인하여 파당싸움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3)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