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0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239 - 262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魯認은 1597년 8월 15일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일본에 끌려갔다가, 1598년 3월 명의 배를 통해 일본을 탈출한 被虜人이다. 노인은 조선인들이 전쟁의 주역으로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소개하고 그가 집권하면서 일본은 혼란에 빠졌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히데요시의 집권과정과 죽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설명을 했지만, 일본의 성씨제도는 잘 못 이해하기도 했다. 또 다른 전쟁 주역으로 여겨지던 對馬島에 대해서는 조선과 일본 모두에 속한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도 쓰시마가 일본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복수를 위해서는 쓰시마를 간첩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던 쓰시마 藩屛意識에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은 성리학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철수를 전략적 후퇴로 생각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집권은 히데요시의 뜻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의 재침을 확신했고, 일본과의 국교재개도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이에야스 집권 이전 일본을 탈출하였던 만큼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제공한 전후 일본의 정세와 이에야스 관련 정보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피로인들 중에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대일인식의 변화를 보인 인물들도 있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이러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게 일본은 오로지 복수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이는 전쟁 중 자신은 납치당했고 부모와 두 아들을 잃었다는 개인적 경험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성리학적 예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華, 일본을 夷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2)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