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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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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74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31 - 154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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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임진왜란기 명군의 접반사로 일본과의 강화협상 현장에서 활동했으며, 1596년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을 직접 다녀온 황신의 대일인식을 다룬 것이다. 명은 벽제관전투 패전 후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려 했다. 명의 대일강화 추진에 대해 황신은 반대의 입장이었다. 통신사에 임명된 후에도 그는 일본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강화를 반대했다. 그는 일본을 다녀 온 후에는 일본의 재침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황신은 성리학적 윤리규범을 기준으로 일본 가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일본의 성풍속은 금수와 같으며, 일본 여성은 음란하다고 하였다. 전쟁의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나타내어, 히데요시의 집권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조선인들이 침략의 원흉이라고 생각했던 쓰시마(對馬島)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일본 사행 후 쓰시마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인정하고 쓰시마 정벌을 주장하였다. 황신은 성리학적 시각으로 일본을 이적시하였고, 조선이 일본보다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일본의 자연환경과 음식물 등을 통해 일본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황신이 일본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 풍속의 간결함과 일본인의 장점도 인정했다. 일본에서는 농민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일본의 영토가 조선 보다 협소하다는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황신의 대일인식은 화이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사행에서 객관적 시각으로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적어도 전쟁 전과 비교하면 그의 대일인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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