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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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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학연구회 불교학연구 불교학연구 제54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95 - 11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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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문수신앙과 문수신앙은 별개의 연원에서 출발하는 신앙들이며, 두 신앙은 구분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수신앙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의거한 신앙이며, 오대산문수신앙은 『화엄경(華嚴經)』「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오는 청량산(淸凉山)을 중국의 대주(代州) 오대산으로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중국 오대산문수신앙의 형성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동진시대부터 남북조시기까지(418-581)를 ‘문수신앙의 출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부터 당까지(581-798)를 ‘문수신앙의 흥성 및 오대산문수신앙의 출현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수당 시기에 이르러 문수신앙이 군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오대산이 7세기 후반에 당나라 군주가 지원하는 전국적인 성산(聖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수용 시기는 8세기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다. 법장(法藏, 643-712)이 편찬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권15에서 청량산이 대주 오대산이라고 설명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이 승전(勝詮, ?-?)을 통해 신라로 전래되었고, 이후 의상(義湘, 625-702)도 인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청량산=오대산’이라는 인식이 의상 현존시기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가진 전래 과정을 통해 오대산문수신앙은 신라 중대에 전격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신라는 내부적으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러한 당시 신라의 정세를 생각해 볼 때, 오대산문수신앙을 수용한 정황이 좀더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덕왕이 즉위할 때와 즉위 이후에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명주지역의 불교 세력을 규합하여 현세적 이익 측면의 성격이 강한 오대산문수신앙을 체계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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