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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13권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117 - 14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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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의 <단심가>는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시조작품이다. 한글로 표기된 작품이 ≪청구영언≫을 비롯한 30여종의 가집에 수록되어 있다. 한역시도 여러 악부시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12종에 이른다. 그럼에도 일부 연구자는 포은이 <단심가>의 작자임을 부정하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단심가>를 포은의 작품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전제로 제기된 사항은 시조 발생시기, 역사서의 관련 기록 부재, <단심가>의 배경과 한역시가 임진왜란 이후에야 발견된다는 사실 등이다. 이들은 17세기 이후에 포은의 순절이 정치 담론화 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부회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같은 전제가 시조의 발생 시기도 고려말엽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이같은 주장은 포은의 시조가 <단심가>로 정착되기 이전 시기에는 <백사가(百死歌)>, <백사정충가(百死精忠歌)>, <포은가(圃隱歌)>로 지칭 되어 구전되었음을 간과한 심각한 오류이다. <단심가>가 임진왜란 이전에도 구전되었음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심가>는 사림들 사이에서 <백사가>로 구전되어지다가 중종조 이후에 표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포은의 순절처인 선죽교를 탐방한 문인들은 강개하며 <단심가>를 가창하거나, 한시에 감회를 담았다. 심광세의 ≪해동악부≫에 <단심가>의 배경과 한역시가 수록되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단심가>는 효종, 숙종, 영조 등 임금과 사대부, 교방의 기녀들까지도 즐겨 불렀다. 포은의 시조 작품이 <백사가>로 구전되었음은 포은의 ‘순절(殉節)’을 보다 강하게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 반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단심가>로 불린 것은 ‘정충(精忠)’을 더욱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숙종이 <영정포은단심가>라 시제(詩題)한 것도 군주의 입장에서 포은의 순절보다는 단심을 부각하려는 당연한 발상이라 하겠다. 이같은 계기로 인하여 포은의 시조가 <단심가>라는 제목으로 정착한 것이다. <단심가>에 담겨진 포은의 진실은 ‘절의(節義)’이다. 포은의 <단심가>가 오랫동안 구전되고 가창되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던 동인도 바로 이런 진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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