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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과학원 개념과 소통 개념과 소통 제11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5 - 4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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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통 유교의 근대성 또는 근대화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와 논의는 중국의 전통 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중국만큼 유교적 전통이 깊은 한국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본 연구는 박은식의 유교관과 그의 근대 수용의 창인 양계초의 유교사상을 비교하여 동아시아 전통 유교의 근대화라는 연구 영역 중 한국 유교의 근대적 선택을 보고자 하였다. 박은식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이 구체화되던 구한말 당시 근대적 국가 형성을위해 한국의 전통 유교와 근대성의 관계를 재설정한 유교 지식인이자 실천적사상가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자강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서우(西友)󰡕에 양계초의 「愛國論(애국론)」을 번역·기고하였다. 이 글은 1899년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약 3분의 1 정도만 번역·기고한 것과는 달리 원본을 거의 대부분을 번역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도 ‘중국이 과거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무이한 국가’라는 몇 문장이 생략되었다. 그가 이 부분을 생략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이 지문들이 당시 ‘화이론(華夷論)’, ‘도통론(道通論)’에 근거하여 근대적 국가로의 이행을 거부하는 보수적 유교 지식인의 사고, 즉 중화주의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중화주의는 일종의 사대주의로 당시 일본의 보호국체제에서 벗어나 자주적 국가 수립을 요구하는 박은식, 장지연, 김원극(金源極) 등 자강주의자들에게는 부정적인 사고였다. 그러므로 이 번역문 속 의도적으로 생략된 지문은 그의 대한정신과 반중화주의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자강론이 1908년 이후 한계에 부딪히면서 박은식은 유교의 종교화를 추진하게 된다. 박헌용(朴憲用)에 의하면, 이 종교화는 일종의 대중화라 할 수 있다.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사변화를 통해 지적 우월과 이를 확장하여 계급 우월을 강조하는 전통 유교계의 보수적 논리를 반박하면서 일반 국민정신에 부합하는 간결성, 실천성 그리고 구세정신 등을 통한 유교 개신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이 유교 개혁은 자강론과 같이 궁극적으로 일반 국민의 자기 정체성과 민권 의식을 향상시켜 조선이 보호국체제에서 벗어나 근대적 자립 국가로 형성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한편 이 논문은 양계초의 「論支那宗敎改革(논지나종교개혁)」과 같이 유교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그 출발점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자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과는 달리 후자는 당시 청조의 사회 지도층인 향신층을 위한 개혁이었다는 점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박은식이 양계초와 같이 유교 전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근대성의 방향에서 차이가 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사회주의 인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박은식은 1925년이 독립운동을 지속시킬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평가했다. 그리고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독립운동의 지속을 위해 사회주의의 구세주의와 철저한 실천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한편 양계초는 『先秦政治思想史(선진정치사상사)』(1922)에서 사회주의를 묵가로 보던 이전 관점을 바꾸어 유가로 재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 한대(漢代) 이후 제자백가가 사라지고 오직 유교가 국가 통치의 사상체제로 발전한 것과 같이, 공화주의와 국가주의 즉 당시 사회진화론적 세계 질서가 사라지고 사회주의 즉 유교가 세계 신사조가 될 것이라 추론했다. 이처럼 박은식과 양계초는 모두 유교적 배경하에 성장했으나, 유교와 근대에 대한 그들의 현실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수받은 유교와 당시 중국과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들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박은식의 유교는 중화 전통을 중시하는 양계초와는 달리, 한국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자강주의,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개신유교, 강요된 평화보다는 자주 독립을 향한 철저한 실천적 독립 투쟁 등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도 전통 유교와 근대 간의 소통, 공존 및 융합, 발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회자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약 1세기 전 박은식의 선택은 우리에게 전통과 현대가 ‘어떤 형태로 양립,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좋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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