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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77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57 - 285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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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성주지역은 남명 조식의 고제인 김우옹과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 모두 출입한 정구, 퇴계문하에 출입한 이순 등이 활동하면서 학문적으로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중간지대에 속하였다. 성주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둔지였으므로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성주지역의 한강학단은 송원기, 이순, 배상룡 등이 의병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성주를 수복한 것은 정인홍의 역할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임란 이후 성주지방은 정인홍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정구와 그의 문인들로 구성된 한강학단은 임진왜란 이후 천곡서원을 중건하고 여씨향약에 기반한 통독지회를 개최하는 등 성주지방을 蘇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구의 향촌사회 소복책은 예안, 상주 등 퇴계학파가 여러 지역에서 실시하였던 것과 같은 예교중심의 소복책이었다. 정구의 문인인 송광계도 동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사회의 정비 노력을 경주하였다. 정구 자신도 또한 동약을 실시하여 향촌사회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란 이후 성주지역은 남명 문하의 적전을 표방한 정인홍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정구 자신은 1610년 발생한 박이립 사건으로 인하여 성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강학단은 박이립이 정인홍의 사주로 인하여 고변하였다고 인식하였으며, 정구는 결국 1620년 칠곡의 사빈에서 생을 마감하여야 했다. 정구 사후 정구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한강학단은 광해군 14년 정구의 강학지인 회연 백매원에 회연서원을 창건하고 인조 5년 정구를 배향함으로써 성주지역에서 한강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한강집』 등을 편찬, 출간하여 정구가 의도하였던 향촌사회의 재건 방안을 공인받고자 하였다. 인조반정 후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이 몰락하자 성주지방은 정구의 한강학단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성주 한강학단은 퇴계학맥으로 접맥되어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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