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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4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027 - 1,05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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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지방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초순부터 4월 초순에 집중되어 일어났다. 함안지방의 3.1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식민지 행정기관에 대한 공격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3.1 운동을 전후 했던 시기 함안지방의 사회경제적 배경 등이 구체적 운동 양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학인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함안지역의 토지 소유 관계와 농업 상황, 그리고 상업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함안지방 농민구성을 분석한 결과 이곳에는 지주·소작관계에 의거한 대토지 소유자는 매우 적었으며, 함안지방은 자작농과 자작겸소작농이 타지역보다 많았으며 이들이 주도가 되어 3·1운동을 추진하였다그리고 함안지방에는 토지조사사업기 많은 토지가 일본인들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점을 밝힐 수 있었다. 1914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들은 함안군의 토지를 대규모로 집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함안 군민들과 상당한 마찰을 일으켰고 이 점이 함안군민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한편으로는 함안지역의 지주․소작 관계와 농업경영 상황을 분석하였다. 함안군에는 3·1운동 이전까지 구래의 지주·소작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지주들은 신분적 상하의식에 입각해 소작농에 대한 봉건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같은 지배관계는 3·1운동 때 대규모의 인원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함안 3·1운동에서 운동양상이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회경제적으로 분석한 결과, 함안의 농민들은 1호당 1정보 미만의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함안의 소작농들은 경영규모나 소출이 경남의 다른 지역 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조건은 함안군의 운동양상이 폭력적으로 나아게 하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는 함안지방이 가지는 지리적 이점을 들 수 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면서 일찍이 교통과 물화유통의 중심지였던 함안지방에는, 대부분의 만세시위가 장시 개시일에 일어났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연계시장에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알려졌는데, 연개장터는 해상과 육상을 연계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농산물과 해산물이 집결되면서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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