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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49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89 - 31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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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에서 홍구공원의거를 일으켜 한국독립운동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가 의거를 결행하게 된 것은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적인 굳건한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은 담대한 성격을 갖고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부터 매우 독립적인 교육을 받았다. 일곱 살 때부터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오치서숙에서 성주록 선생에게 유교사상을 전습받았다. 서당에서부터 17세까지 유교경전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하여 신문과 잡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근대적 학문을 습득하 였다. 그리고 윤봉길은 야학을 설립하고, 부흥원을 건립하였으며, 수암체육회 발족하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월진회를 통해 농민운동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농촌계몽운동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조선 농촌의 생활이 나아질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제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후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 참여하기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은 매월 2~3차례 백범 김구를 만나 그의 독립운동 사상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김구는 현재 우리 민족이 일제와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계전쟁이 일어나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야만 한다고 윤봉길에게 설파하였다. 김구의 독립운동 방략에 적극 찬동한 윤봉길은 세계전쟁이 발발하면 우리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하에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키게 되었다. 윤봉길이 1932년 4월 29일 중국 홍구공원에 거행한 의거는 형태상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한 투탄의거라고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 윤봉길의거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온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보다 앞당기기 위해 실행한 거사였던 것이다. 김구와 윤봉길은 적극적으로 세계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침략을 단행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지만 중국민과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용인하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1932년 1월 8일 김구는 이봉창을 일본의 수부인 도쿄에 파견하여 의거를 일으키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상해사변은 더 이상 중·일 간에 전쟁이 확대되지 못하고 중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결말이 나고 있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에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을 확대시키기 위해 윤봉길로 하여금 ‘홍구공원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로 인해 중국정부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대일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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