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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90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33 - 6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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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종이 永安橋를 세운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산해관을 돌파하기 위해 낸 군대를 출발지인 심양에서부터 진흙탕에 빠뜨릴 수 없었다. 심양에서 고가자에 이르기까지의 진흙탕에 흙을 쌓아 길을 만들었고[築路], 그 초입에 돌로 다리를 만들어 길의 시작을 알렸던 것이다. 청 태종은 그 길을 따라 지속적으로 西征했지만 끝내 山海關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아들 順治帝에 이르러 산해관을 넘어 北京을 정복했고, 마침내 수도를 옮기면서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이제 심양에서 北京으로 황제를 뵈러 가야했던 조선 사신들에게 ‘永安橋’라는 다리는 ‘영원히 편안하게 진흙탕길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 ‘중국을 영원히 평안하게 하리라’는 오랑캐 황제의 커다란 욕망과 포부로 인식되었다. 17세기 후반 연행사들은 ‘영안’이란 이름에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오랑캐의 운세가 백년을 넘을 수 없다’며 청나라의 국운이 기울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강희-옹정-건륭의 治世를 이룬 청나라의 발전기 18세기 연행사들은 그들의 국가 운영 시스템과 경제 발전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수레를 활용해 편안하게 왕래하면서 목격한 변경[지방]-북경[중앙] 사이의 활발한 교류와 엄청난 물산의 이동에 압도된 연행사들은 영안교의 효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 강희와 건륭이 심양의 선대 황제릉에 순행[東巡]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심양은 북경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 아니라 북경에서 오는 길의 종착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황제의 순행에 맞추어 한때 매몰되었던 축로가 다시 만들어지면서 영안교는 청나라 황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떠나는 길고 힘든 길의 종착점이 되었다. 영안교는 어느덧 조상을 섬기기 위한 길의 가장 험악한 곳에 놓여져, 더 이상 걱정 없이 다닐 수 있게 만든 다리가 되었다. 황제들이 조상을 섬기는 아름다운 뜻을 함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안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전쟁 후 적대적으로 시작한 대청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마침내는 명나라 때와 다름없는 책봉조공체계로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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