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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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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57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79 - 325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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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우선 미국 북 장로회가 한국에 대해 선교를 개시하게 되는 배경과 그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 1차 사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에 대해 선교가 개시되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 1843~1928)의 책이 선교의 바탕을 제공하였다면 일본에서 일어난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의 세례는 보다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직접 접한 것은 이수정에게 세례를 준 녹스(George W. Knox, 1853~1912)가 소속된 미국 북 장로회와,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가 소속된 미국 성서공회였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는 한국에 대해 미국 북 장로회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에는 일본과 중국 등 두 지부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국 성서공회는 직접적인 한국 선교에 나서지 않고 이수정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에 반해 미국 북 장로회의 총무 엘린우드(Frank F. Ellinwood, 1826~1908)는 한국 선교 가능성에 대해 일본과 중국 두 지부의 선교사들에게 의견을 모아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일본인 2명이 한국을 답사했으나 여러 이유로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엘린우드는 한국어와 중국어의 유사성에 주목하였기에 결국 한국 선교는 중국, 특히 산동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1883년 12월 14일 제남의 헌터(S. A. D. Hunter)와 리드(Gilbert Reid, 1857~1927)가 한국행을 지원했지만 선교본부는 주로 중국어와 한국어 습득에 따른 어려움을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수정의 한국 선교 요청 소식이 전해지고 1884년 2월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 기부 의사가 전해지자 미국 북 장로회 선교본부는 같은 해 4월에 동 테네시의 젊은 의사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6~1890)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해 한국 선교를 준비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본문에서는 헤론이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이 첫 선교사로 내한하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부분에서는 그간 거의 공개되지 않거나 활용되지 못한 사료들을 충실하게 인용하여 객관적인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알렌이 예기치 못하게 헤론보다 먼저 한국에 오게 된 데에는 세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가 의료 사업 전개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점, 이미 중국에 가서 한국행을 희망하고 있던 알렌이 소속되어 있던 장로회에 비해 미국 감리회는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확보하는 데 보다 시간이 걸린 점, 그리고 알렌 부인의 건강 등의 문제로 알렌이 중국에서 선교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지 못한 점 등이 그것이었다. 미국 북 감리회는 이수정의 세례 소식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미국에서 11월 견미사절단 일행을 만나 한국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가우처(John F. Goucher, 1845~1922)가 선교부에 이를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자 그는 일본의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에게 한국을 답사하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맥클레이는 1884년 6월말 서양 선교사로서는 한국을 공식적으로 처음 방문해 고종(高宗, 1863~1919)으로부터 병원과 교육 사업에 대한 윤허를 받았지만 감리회 본부의 한국 선교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에 있던 북 장로회 소속의 알렌이 9월 방한하여 비록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지만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1856~1922) 등을 임명해 한국 선교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알렌은 1883년 10월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부인의 건강 때문에 임지로 가지 못하고 남경과 상해에 머물렀다가 1884년 6월 주위 동료 의사들의 권유로 한국행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가능성이 보이자 선교본부에 한국행을 요청했고 9월 20일 내한했다.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와 최초의 상주 선교사가 되었다. 반면에 첫 선교사로 임명된 헤론은 자신의 선교사 자원에 대해 의사를 번복한 적도 있고 일종의 완벽주의자여서 보다 훈련을 받고 파송 받고 싶어 했다. 그런 와중에 알렌이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헤론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알렌과 함께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결국 1885년 2월 헤론의 한국 파송 결정이 났고 선교사로 임명 받은 지 1년이 넘은 6월 내한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본문에서는 미국 북 장로회의 한국 선교 개시의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크게 보아 미국 북 장로회의 선교 개시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북 장로회의 한국 선교 개시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삼국과 미국 선교 본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 선교의 개시는 미국 북 장로회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성서공회, 미국 북 감리회 등 복수의 기관 및 선교기관들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끝으로 한국에 대한 선교의 개시에는 선교본부의 의지 뿐 아니라 이수정의 활동, 한국 정부의 개화에 대한 의지 등이 맞물려 있었기에 한국에 대한 미국 북 장로회의 선교는 처음부터 교회, 병원, 학교 등 이른바 트라이앵글 메소드가 보다 용이하게 정착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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