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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신학연구소 신학과 선교 신학과 선교 제41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79 - 30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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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경직 목사가 복음주의 목회자였기에 북한에 대한 비정부적인 지원에 열정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남한의 탁월한 사회봉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구분하여, 꾸준히 북한의 그리스도인들과 주민들에 대한 염려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냉전, 그리고 데탕트에 이르는 당시의 사회­정치적 이슈에 응전하는 목회적인 노력이었다. 첫째, 피난민 목회자로서, 한경직 목사는 자신이 목회하고 설립하고 운영한 교인, 고아, 양로원을 공산치하에 남겨두었고, 전쟁과 전후 순교자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그는 자주 북한에서 남하한 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한 경제적 복음주의적 지원에 헌신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 북한을 돕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철저히 반공산주의에 근거했다. 1960년대 한경직 목사는 북한 공산치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남북 정상 사이의 비밀외교를 통한 방법보다는 비정부적인 경로를 통해 북한주민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셋째, 민주화 운동이 한국사회에서 일어났을 때, 영락교회는 개인적인 경건과 영성에 집중한다. 한경직 목사는 은퇴 후 여생을 북한주민을 돕는 데 쓰기로 결심하고, 은퇴 후 남한의 잉여 쌀을 북한에 보낼 것을 제안한다. 이 운동은 남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 결국, 이 글은 한경직 목사의 업적은 한국사회의 필요라는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하고, 그가 사회적인 이슈에 민감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목회자로서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보수적인 신앙인으로서 사회적 행동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예 가운데 하나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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