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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18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55 - 28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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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의 불교 고승의 국도 奠都 및 遷都의 의의를 천착한 연구이다. 신왕조의 창업 후 그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고승의 참여는 나라의 심장부인 국도 전도나 국가적 위기 속에 행하여진 국도 천도는 불교 고승으로서 민중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도선은 삼한을 통일할 왕건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개성을 국도로 지목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왕건은 불교의 가르침대로 국가를 운용하였으며, 구체적으로 사찰을 창건 또는 지정하였다. 도선의 제자 여철은 남경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오늘날 서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도 당시 보수화된 정치와 불교계에 혁신을 일으키기 위하여 천태종을 개창하고 주전론을 주창하면서 남경천도 주장에 참여한 듯하다. 묘청은 事大가 아닌 事佛, 즉 진리를 섬겼기 때문에 地氣가 쇠했던 개경에서 고구려의 오랜 수도였던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면 주변의 36개국이 조공을 바치는 황제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몽고침략기에도 한양으로 국도를 삼게 되면 나라의 수명이 800년 연장될 것이라는 아사달 신앙이 유행하였다. 공민왕의 왕사 태고보우는 원나라에서 귀국후 삼각산 중흥사와 태고암에 머물면서 한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바로 한양천도 주장이다. 신돈은 전민변정의 개혁을 하면서 근본적인 방도인 서경과 충주 천도를 주장하여 민중으로부터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조선 건국직후 무학은 왕사로 책봉되어 한양전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곧 한성을 비보하는 4대 사찰을 비롯하여 불교계의 재편사업을 전개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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