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동양고전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351 - 382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김유신은 전통적으로 名臣이자 궁극적으로 신라의 통일을 이룩한 名將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국권침탈시기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그의 업적은 폄하되어 민족의 자주성을 해친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근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그의 업적은 폄하되어 당파적 이익에 매몰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김유신과 그의 선대는 망국의 왕족으로서 신라 귀족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전개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 무훈을 통해 그 일족은 신라의 삼국통합에 기여하고, 신라 중대왕실의 개창에 일조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때로는 비열하다고 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김유신의 부 김서현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왕실 여인 萬明夫人과 야합했고, 김유신은 그의 누이를 김춘추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기 위해 모략을 꾸미기도 했다. 김유신의 선대와 그 자신이 살았던 7세기는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이며, 특히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대야성의 함락은 신라의 새로운 귀족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진지왕계와 김유신 가문에 직접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유신은 김춘추를 도와 근원적으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백제 정벌을 추진했다. 그 결과는 이른바 ‘삼국통일’이었다. 김유신과 그 가문은 무력이 약하여 신라에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력을 기반으로 신라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신라는 위기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고, 김유신과 그 가문은 이를 제공했다. 이로써 김유신과 그 가문은 삼국통합이라는 역사적인 경로에 생존을 위해 갖추었던 무력을 갖고 참여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합은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김유신과 그 가문의 행적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