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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고전학회 동양고전연구 동양고전연구 제39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05 - 13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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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澣의 모반 사건은 인조 9년(1631)에 일어났다.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모의 단계에서 고변으로 실패한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각종 모반 사건이 빈발했던 仁祖代의 다른 사건과 몇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질적인 세력들의 결합에 의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충청도의 옥천에 기반을 둔 중인 계층의 權大進, 전국을 떠돌던 유랑 지식인 楊天植, 大北 세력의 남은 패거리였던 鄭澣과 朴禧集 등이 각각 서로 다른 전망 속에서 합세하여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질적인 세력의 결합인 만큼, 이 사건은 이전의 다양한 모반 사건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후의 많은 사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柳孝立이나 韓會 등의 모반 사건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으로,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던 大北 세력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이후 大北이 주도하는 모반 사건은 나타나지 않게 되며, 결국 이 사건은 대북의 마지막 모반 사건이 되었다. 유랑 세력의 거사라는 점, 崔瑩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인조 7년(1629)의 李忠慶 사건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최영의 상징은 이후 인조 24년(1646)에 일어나는 安益信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鄭鑑錄}과의 관련 여부이다. 鷄龍山을 중시하는 풍수지리설과 眞人을 기대하는 민간 신앙이 거사 과정에 투영되고 있는데, 이는 정감록의 실체적 기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異人으로 상정된 鄭氏인 鄭澣이 풍수와 관상에 능하다는 양천식의 무리에게 선택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추정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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