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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32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81 - 21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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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시대의 기자 인식을 살펴보며 『帝王韻紀』와 같은 후조선=기자조선 인식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한시대에 기자동래설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고구려가 평양지역을 차지하며 기자에 대한 신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고구려가 기자를 선조로 생각한 낙랑유민들의 신앙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록에는 없으나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기자에 대한 민간신앙이 제한적으로 내려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국가들은 고려를 기자와 고구려의 뒤를 이은 국가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기자를 강조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표현은 외교적 수식에 그쳤고 실제 고려 내부에서도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거나 ‘기자조선’이란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단군에 대한 기록들이 다양한 문헌에 전하고 있었고 단군의 정통이 고구려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있음을 보면 고려는 국초에 ‘단군(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체계에서 기자의 존재는 들어갈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에 대한 국가 제사는 숙종대부터 있어왔으나 고려시대에 그것은 雜祠에 속했고 제대로 시행된 것 같지 않아 箕子는 막연한 ‘敎化之主’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신라 중심의 새로운 역사서를 만들면서 구체적으로 고조선사를 다루지는 않았으나 단군보다 기자를 강조한 듯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이후 『三國遺事』는 기자를 인정하지 않고 왕검조선이 1,908년 동안 계속 내려왔다고 인식했으나 『帝王韻紀』는 기자 동래 이전에 이미 단군의 통치가 끝났고 이후 기자가 세운 후조선이 이어져 왔다고 보았다.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과 기자 약 1,000년씩으로 나누어 양자를 동시에 인정한 일종의 타협적인 인식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성리학이 도입된 원간섭기에 기자는 더욱 강조되면서 명실상부한 후조선의 시조로 한국사에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기자조선설은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게 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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