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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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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7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33 - 17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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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점진설의 시각에서 양계초 사상전환과정과 그의 국가주의 관점을 논의하였다. 연구의 초점은 양계초가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의 민주사상에서 블룬칠리의 보른하크 등의 국가주의로 전환과정과 그의 국가주의 관점을 검토하였다. 1903년 이전 양계초는 근대 서구 민주제도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을 통해, 천부인권, 사회계약론, 주권재민설 등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양계초는 서구의 자유, 민권 등 민주주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파괴와 혁명,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건설 등 개혁파로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양계초의 정치사상이 민주주의에서 국가주의로 전환한 것은 1903년 미주 여행이후 돌변한 것이 아니라, 1903년 이전부터 점차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가 국가주의 학설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99년 블룬칠리의 『국가론』에 대한 번역부터이지만, 1901년 『루소학안』을 소개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의 사상이 국가주의로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일련의 국가주의 관련 문장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그는 국가주권·국가인격·국가유기체·국가조화론 등 국가주의 사상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음은 물론 점차 경도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02-1903년 미국 방문 기간 중 발표한 『신중국미래기』에서 양계초는 그의 국가주의 입장을 작중 인물인 독일 유학파 황극강에게 주입시켜, 그의 사상이 국가주의로 전환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903년 미국방문 후 발표한 「정치학 대가 블룬칠리의 학설」의 발표는, 양계초가 공화정체와의 공개적으로 결별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가 1903년 이전에 주장한 루소와 몽테스키외의의 삼권분립과 사회계약설, 그리고 『신중국미래기』에서 작중 인물인 이거병을 통해 제기한 루소, 벤덤, 밀 등의 ‘주권재민’, ‘사회계약’ ‘자유평등’, ‘민권’ 등의 정치사상과 결별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국가주의로의 공개천명 후, 양계초는 1902년 이전 그가 꿈꾸었던 민주주의를 전면부정하고 국가주의를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정치주장과 여론형성의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양계초는 우선, 역사적 사실과 국민자격 결여의 이유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천부인권론·주권재민설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국가유기체설과 국가 조화론을 근거로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의 실현 가능성을 비판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유기체설·국가주권·국가인격·국가법인 등 국가주의 관점을 채택하여 그의 정치주장에 반영하고 있다. 또한 양계초는 각종 이해관계와 충돌에 초연한 최고의 국가기관을 상정하여, 이를 통해 권력분립 대신 권력집중을 강조하고, 권력기관과의 상호견제 대신 권력 통합과 조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초월적 국가주권과 최고의 국가기관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첫 번째 정의로, 국가의 목적과 안위에 따라 국민 개개인을 수단으로 다룰 수 있다는 국가목적론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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