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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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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5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9 - 6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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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신주편은 신라로부터 연유한 고려의 밀교종파를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설정되었다. 惠通降龍조가 중간에 배치되고 明朗神印조로 신주편이 마무리된 것은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일조한 神印宗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혜통항룡조에는 구체적인 인용서목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출신, 출가동기, 수행과정, 행적 순으로 나타난 서술방식을 통해 혜통의 전기 자료가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信忠奉聖寺의 연기설화가 수록된 「三和尙傳」이 바로 혜통항룡조의 전거자료라 판단된다. ‘三和尙’이란 표현에 유의해 신주편을 검토한 결과, 密本摧邪조와 明朗神印조는 같은 자료에 근거해 서술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로 볼 때 「삼화상전」은 혜통 한 사람의 전기이다. 혜통의 별명이 ‘王和尙’이라는 점에서 본래 이름은 「王和尙傳」일 것으로 생각된다. 혜통항룡조는 「왕화상전」이란 단일자료에 의거한 서술이지만 내용 자체에서 시기 상 모순된 표현이 찾아진다. 바로 ‘信忠’과 ‘無畏三藏’이다. 혜통항룡조의 신충을 信忠掛冠조의 신충과 동일인물로 본다면 신문왕대와 효소왕대를 배경으로 하는 혜통의 활동시기를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奉聖寺의 완성이 신문왕 5년(685)으로 확실함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皇福寺碑片」에서 확인되는 성전사원인 ‘奉聖神忠寺’가 信忠奉聖寺를 의미한다면 혜통항룡조의 봉성사 창건설화는 신문왕대로 인정될 수 있다. 즉 혜통항룡조의 信忠은 본래 ‘神忠’으로 신충괘관조의 주인공과 다른 인물이다. 신충봉성사의 설화는 신문왕의 대민안정 의지를 상징한 것이며, 그것을 중재했던 밀교승려 혜통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혜통항룡조의 연대가 사실이라면 혜통의 스승으로 등장한 무외삼장이 의심된다. 무외삼장은 8세기 중기밀교를 처음으로 전래한 善無畏를 뜻한다. 곧 무외삼장은 혜통의 후예에 의해서 내세워진 존재이다. 8세기 이후 신라출신의 밀교유학승들은 선무외 문하에 몰려있었는데, 이는 『大日經』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 있다. 신인종의 계보가 金剛界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혜통의 후예도 胎藏界의 계보를 염두에 두고 선무외를 혜통의 스승으로 가상하였을 것이다. 대체로 9세기 전반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밀교교단의 정통성을 위해 법맥도를 작성하였다. 이런 경향이 신라에도 영향을 미쳐 「왕화상전」이 저술되고 선무외가 혜통의 스승으로 내세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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