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49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29 - 165 (3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