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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32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203 - 23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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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임란 의병장 郭再祐(1552-1617)의 문집 중에 수록된 ‘年譜’의 자료적 성격을 살핀 글이다. 곽재우의 문집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초간본이 아닌 간행 시기가 불분명한 간본과 영조 때 간행된 중간본의 두 간본이 전하고 있으며 두 책에 수록된 연보는 인조 15년(1637)을 전후해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이 두 연보에 나타나는 곽재우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임란전 행적에 관한 연보의 기록은 곽재우의 성품이나 자질, 그의 학구적 자세나 장래의 촉망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대체로 곽재우는 인물됨이 비범하였으며, 學文에 힘쓰고 儒行을 닦고 실천했던 인물로서 기록하였다. 六藝를 익히거나 兵書를 읽는 등 다방면에 관심을 관심을 가지긴 했으나 이는 학문하는 여가에 이루어진 것이고, 武人이나 將帥로서 보다는 儒生 혹은 文士의 길을 충실히 닦았던 인물임을 드러내려 하였다. 임란 이후 곽재우의 행적에 관한 연보의 기록은 경상감사 김수의 처단을 주장한 격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격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초기 간본과 중간본 간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중간본에서 이를 보다 자세히 기록하여 격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일에 신중을 기했다. 연보의 기록은 격서 사건이 곽재우의 충성심과 의분의 발로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의 의병 활동에 대한 조정의 격려와 포상, 관직의 제수는 이러한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격서 사건 이후 망우당의 행적에 대한 연보의 기록은 목사, 조방장, 방어사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주로 산성의 수축과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등의 공적 활동에 충실하였다는 것과 계모상을 당한 이후 벼슬을 버리고 상제를 엄수하는 데 오로지 정성을 쏟았던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동안 수차례의 관직 제수와 소명에 응하지 않은 것은 그가 효성이 지극한 인물임을 드러내어 유교 윤리에 철저한 인물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상제를 마친 이후 영암 유배에 이르기까지 곽재우의 행적에 대한 연보의 기록은 그가 出處에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보인 인물임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상제를 마친 후 그는 벼슬 길에 나아가나 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건의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게 되며 이 때문에 영암에 유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연보에서는 그의 벽곡 생활이 영암 유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기록하여 그가 원래부터 도가적 취향의 인물이 아님을 밝히고자 하였다. 연보에서는 곽재우가 영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부터 화식을 끊고 솔잎을 먹는 생활을 상당 기간 계속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 즉위 이후 타계하기 까지 곽재우의 행적에 대한 연보의 기록은 그가 국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국정이 잘못될 때에는 소신있는 주장을 펼쳤던 인물임을 부각시킴으로써 그가 현실 문제를 외면하는 ‘方外之士’가 아님을 드러내려 하였다. 그리고 이 동안 주로 非北人系 인물과의 교유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정치적 언동이 당쟁에 편승한 당파적 소행과는 무관함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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