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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34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37 - 7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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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세기 말 이후 영남지역 노사학파의 모습과 송산 권재규의 노사학의 계승과 영남지역에서의 활동을 분석한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은 19세기 이래 당색이 약화되고 幼學層이 성장하면서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에 많은 학자들이 조야에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奇正鎭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영남의 노사학파는 남인 출신도 있었지만 대체로 노론 위주의 인물들이었다. 영남의 노사학파는 정재규를 중심으로 활발한 강회활동을 통해 성리학이나 기정진 학설의 심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기정진의 主理論이나 衛正斥邪思想이 영남지역에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1890년 간행된 『答問類編』이나 1901년 奇正鎭 문집의 목판본 간행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淵齋 宋秉璿이나 艮齋 田愚 등의 기호학계에서는 기정진이 지은 「猥筆」이나 「納凉私議」의 내용이 栗谷 李珥의 학설과 다르다고 문제 삼았으며, 노사학파에서는 기정진의 학설을 변호하면서 이들과 활발한 학술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정진 학설을 비판하였던 연재나 간재 학파, 변호하였던 영남지역 노사학파 모두 성리학 이해 수준이 깊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정재규의 문인 권재규 역시 이러한 학술토론에 참여하여 노사학을 철저히 계승하게 되었다. 권재규는 어려서는 崔琡民에게서 배우고, 1888년부터는 鄭載圭에게 급문하였다. 그는 정재규로부터 주자학과 기정진의 학설을 전수받고, 노사학을 주리설에 기반한 理一分殊와 心性一致說 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정재규가 「猥筆」과 「納凉私議」를 변호하였을 때, 理主氣僕의 관점과 이기심성에 관해 철저히 이일분수를 관철하는 의견을 개진하여 정재규에게 모두 수용되었다. 이후 권재규는 정재규의 뒤를 인물로 지목되었으며, 정재규가 타계한 이후에는 夷川 南昌熙에 제기된 심설의 반론에 대해 農山 鄭冕圭의 동의를 받음으로서 권재규의 학설이 영남지역 노사학의 정통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어 1916년 정면규가 1918년 明湖 權雲煥이 타계함으로서 권재규는 영남지역 노사학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게 되었다. 기정진과 정재규로 이어지는 노사학을 계승한 권재규는 일제치하에서 영남지역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노사학파가 영남지역에 계속적인 성세를 구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기정진 문인들의 문집 간행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동문들과의 교유를 통해 성리학이나 예학, 노사학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으며, 향사 등을 통해 노사학파의 명맥을 유지해갔다. 또한 활발한 강학활동을 통해 단성지역을 비롯한 경상 우도 지역에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문인들에게 노사학파의 위정척사의 주지를 강론하고 그 자신 솔선수범하여 실천하였다. 그는 日帝治下를 노예의 상태로 규정하고 우리의 예의와 정신을 잃지 않아야 강토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고, 해방이 되자 예와 덕에 기반한 유도가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서양의 정치나 기술을 배울 수는 있으나, 우리 강토와 유학에 기반한 정신을 다시는 그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권재규는 기정진과 정재규의 학설을 계승하고 동문들과의 활발한 교유와 문인들에 대한 강학활동을 통해 노사학을 전파하고 위정척사사상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이에 의리와 도덕에 기반을 둔 노사학이 일제 치하와 해방 이후 줄곧 영남지역에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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