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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부산고고학연구회 고고광장 고고광장 제12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59 - 78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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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대 서부경남 가야의 목곽묘는 규모에서 약간의 차이만 보일 뿐 무덤의 구조와 부장 유물에서 탁월한 유구가 찾아지지 않는 대동소이한 것들이며, 이것은 이러한 무덤을 축조한 집단이 계층분화가 진전되지 않은 촌락사회를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5세기 전반대가 되면 함안 도항리고분군에 목곽묘가 집중적으로 축조되면서 중·소형의 순수 목곽묘와함께 (초)대형이면서 바닥에 礫床과 같은 구조물을 설치하고 甲冑와 馬具 등 다량의 위세품을 부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무덤들을 축조한 집단이 강력한 가야소국이었던 安羅國을 성립시켰음을 보여 준다. 한편 합천 옥전고분군에서도 대형이면서 돌을 이용하여 목곽을 충전하고 바닥에 2개 1조씩의 棺床을설치할 뿐만 아니라 갑주나 마구 등 위세품을 부장한 목곽묘가 축조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에도 함안지역과 마찬가지로 가야소국인 多羅國이 성립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도항리고분군에 비해 (초)대형 목곽묘가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라국이 안라국에 비해 그만큼 열세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세기 후반대가 되면 도항리고분군을 필두로 함안 일원에서 목곽묘는 거의 축조되지 않는다. 이처럼함안지역에서 목곽묘의 축조가 급감하거나 소멸하는 것은 목곽묘를 대신하여 새로운 묘제인 수혈식석곽묘가 지배층의 무덤으로 채택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옥전이나 산청 옥산리 등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목곽묘가 여전히 활발하게 축조된다. 특히 옥전고분군에서는 대형뿐만 아니라 (초)대형의 목곽묘가 축조되고 내부주체가 主副槨을 이루면서 거대한봉분을 가진 고총고분 등이 축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무덤 속에서는 갑주나 마구, 장식대도 등이 복수부장되고, M3호분에서는 鑄造鐵斧를 한 벌 깔아서 관상을 만들 정도로 목곽묘의 축조가 활발하다. 옥전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목곽묘의 이러한 양상은 앞 시기부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다라국이 더욱발전하여 강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세기가 되면 가야지역에서 목곽묘는 거의 사라지고 옥전고분군이나 옥산리유적에서 그 명맥만 유지한다. 따라서 가야의 목곽묘는 5세기 말로서 종말을 고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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