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52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85 - 124 (4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875년 발생한 雲揚號사건 및 이로 인해 1876년에 맺어진 朝日修好條規 곧 江華島條約은 조선과 일본 메이지 신정부의 ‘書契’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강화도조약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만주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고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청과의 세력다툼이었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 청 정부 또한 깊이 관여하게 되는데, 특히 直隸總督으로 재직하면서 청 정부의 대외정책을 전담하던 李鴻章(1823~1901)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직전, 조선의 정권 담당자였던 이유원은 王世子의 冊封을 위한 奏請使의 정사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그리고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直隸省의 永平府에 들은 이유원은 지사 游智開를 통해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청조 대외정책을 전담하고 있던 이홍장을 통해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유원의 을유연행록 『薊槎日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유지개로부터 직접 이유원의 서신을 전달받은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보내는 답장을 통해 조선이 일본과의 국교 재개 문제를 평화적 해결해주도록 주문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조선과 일본의 평화적 해결 방법을 위해 총리아문에도 글을 보냈다. 여기서 이홍장은 총리아문에서 신속하게 대책을 강구하여 은밀하게 조선 정부에 자문을 보내면서, 조선이 작은 분노를 참고 일본 사신을 예로서 접대하도록 권유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북경의 예부로부터 조선에 전달된 이홍장의 중재안은 그때까지 일본과의 국교재개에 대한 조선 조정내의 강렬한 반대의견을 무마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효력이 있었다. 이후 이홍장은 이유원과의 서신왕래라는 비밀외교 통로를 통해 조선의 대외정책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유원과 이홍장의 교류 이면에는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청 정부의 입장과 청의 군사력을 빌어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이 서로 조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홍장과 이유원의 대일 인식에서는 적지 않은 거리가 존재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2)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