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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51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35 - 6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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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의 보덕의 주석처가 기록에 따라 盤龍寺와 盤龍山 延福寺로 나타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반영된 결과로, 과거에 통용되었던 사명과 현재 통용되고 있는 사명 중 ‘기록자의 선택’이 반영된 결과이다. 김부식은 고구려 당시 보덕이 실제 주석했던 반룡사를 선택한 것이고, 최치원은 반룡사가 훼철된 이후 그 자리에 세워진 연복사를 선택한 것이다. 보덕이 마지막까지 주석한 반룡사는 평양 대성산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였는데 『通典』에는 평양성 동북쪽에 魯陽山이 있다고 하였고, 『高麗史』에는 大城山은 九龍山, 魯陽山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대성산의 土名은 龍山이고, 구룡산과 노양산도 이칭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매계 조위(1464~1503)가 쓴 ‘龍山晩翠’에서는 대성산의 이어진 봉우리들을 ‘盤龍’에 비유했는데 산명은 변해도 산세는 변하지 않으므로 용산, 즉 대성산을 반룡산으로 볼 개연성이 있다. 조선시대 자료에서 대성산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고 하였고, 『三國史記』에 영류산은 지금(고려)의 서경 북쪽 20리에 있다고 주기하여 거리 상 영류산과 대성산은 동일한 실체인 것 같다. 영류산이라는 산명이 고구려 왕실과 관련 있어, 신라가 고구려 지역을 재편하면서 산명을 지워버렸을 가능성을 상정하면 650년까지 고구려에서 보덕이 주석한 곳은 영류산 반룡사, 즉 대성산이었을 것이다. 보덕과 문도들은 650년 백제로 이주한 후 완산의 고대산에 안치되었으나 백제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새롭게 편입된 백제 지역과 기존 지역에 대한 행정구역을 재편하던 중 666년 12월, 연정토가 12성을 이끌고 망명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다. 신라는 이들을 안치할 지역을 찾는 과정에서 고구려 출신의 보덕과 문도들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그 시점은 667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출신 이주자들의 안치 문제가 공론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교에 조예가 깊었던 최치원이 보덕의 이주 전승에 ‘飛來方丈’과 ‘3월 3일’을 더하면서 혼선을 빚게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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