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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교육사학회 한국교육사학 한국교육사학 제41권 제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87 - 10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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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경주 옥산서원의 강학 활동 실태와 그것의 의미를 살펴본 것이다. 제향과 교육은 서원의 주요기능이자, 해당 서원의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정치적으로 남인계를 표방하였던 영남지역 사족들은 인조반정, 갑술환국, 무신란(戊申亂) 등을 겪으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는 영남 남인계 서원으로서는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어렵게 만들면서 서원 경영에도 일정한 악영향을 주었다. 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거재와 거접 등의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서원이 증가해갔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산서원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반에 침체된 유생 강학을 위하여 장현광을 초빙하여 강회(講會)를 개최하였다. 이후 경제적 기반이 안정화되어가던 17세기 중반에는 거재(居齋)를 실시하면서 유생들의 서원 참여를 강제하였다. 이후 거재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심원록󰡕을 참고하면, 17세기 후반부터 타읍 출신 유생들도 참여하는 거재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아울러 당시부터 부정기적으로 거접(居接)도 시행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거접은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을 위하여 시행하던 강학방식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초반부터 옥산서원에서는 유생들의 문풍(文風)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매년 산당(山堂)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거접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이후 옥산서원 운영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영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쇄신(刷新)을 추진하였다. 이때 매년 진행하던 거접을 중단하고, 이를 경주부(慶州府) 남쪽의 용산서원(龍山書院)이 승계하였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순제(旬題)와 백일장(白日場) 등을 통해 강학 전통을 계승하고, 유생들의 서원 이탈을 방지하고자 했다. 나아가 19세기 중반이후에는 용산서원과 함께 거재를 시행하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처럼 옥산서원은 유생의 교육을 위한 노력을 17세기 이래로 이어오면서, 정치·사회적 변화와 서원의 운영 상황을 고려하여 강학의 형식을 바꿔왔다. 이를 통해 유생들의 서원 참여를 강화하고 이탈을 막음으로써 경주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이자, 향촌운영기구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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