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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은경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7호
발행연도
2020.3
수록면
387 - 420 (34page)
DOI
10.31218/TRKH.2020.03.137.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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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7년 여름, 중국 옌안에서 있었던 독립운동가 장지락의 구술을 토대로 발간된 『아리랑』을 활용하여 그의 자기 기술과 그 전략을 살펴보았다. 『아리랑』에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중국 광저우에서 머물면서 광주봉기와 하이루펑 소비에트 활동에 가담한 장지락의 경험담이 언급되었다. 다른 기록과 비교해볼 때,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중반 광저우에 있던 한인의 동향과 광주봉기 등에 대한 장지락만의 독특한 ‘광저우 기억’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광저우 한인 사회에 대해 『아리랑』에서는 1927년까지 한인 800명이 중국혁명 참가를 목적으로 광저우에 집결했고 이들은 주로 공산주의와 관련 있으며, 한인 공산주의자를 주축으로 한 K.K.라는 단체도 결성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광저우의 한인수를 그의 절반 수준인 300∼400명 정도로 추산했고, 한인의 광저우 집결 동기를 황푸군관학교 입학에서 찾는 등 차이를 보였다. 광주봉기에 대해서는 주로 장지락의 경험을 위주로 한 반면, 광주봉기군 철수 당시 최용건이 이끄는 황푸군관학교 특무영 내 한인들의 사하 전투 참전과 150명의 희생, 광주 봉기 당시 김성숙의 역할 등은 언급이 없었다.
이처럼 『아리랑』에서 독특한 ‘광저우 기억’이 확인되는 이유는 이 책이 장지락의 구술을 토대로 구성되었는데, 구술 과정에서 그의 광저우 경험에 대한 선택과 재해석이 이루어졌고 이때 일종의 ‘자기 기술 전략’이 작용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지락이 광저우에서의 과오와 한계까지도 함께 밝혔고 구술 당시 만주행을 결심했다는 점에서 그의 ‘광저우 기억’은 새로운 활동을 앞두고 그간의 경험을 일종의 ‘교훈’으로 삼으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보인다.
한편 『아리랑』을 매개로 한 장지락의 ‘광저우 기억’은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1920년대 광저우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기억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지락이 이미 1938년 중국에서 ‘숙청’된 상황에서 이러한 양상은 과거의 기억을 주도하겠다는 장지락 개인의 전략으로는 볼 수 없다. 그보다는 해방 후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공 분위기 속에서 광저우를 경험한 또 다른 당사자의 ‘침묵’이 만들어낸 ‘의도되지 않은’ 결과였던 것이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장지락의 1920년대 중반 ‘광저우 기억’과 특성
Ⅱ. 광주봉기를 둘러싼 기억의 충돌
Ⅲ. 『아리랑』 속 장지락의 ‘자기 기술 전략’과 기억의 주도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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