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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5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95 - 116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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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석굴은 석굴과 함께 마애불이 함께 조성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마애불은 보편적인 불상조성방식의 하나이지만, 중국에서는 대부분 석굴사원 내지 감실 내부에 불상이 봉안되는 방식이며, 공현석굴의 마애불처럼 완전한 마애불 형식으로 조성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마애불의 사례로서 감숙성 번화현 서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북위시대에 사문 류살하가 그 출현을 예언한 바 있고, 그로부터 87년 뒤인 정광 원년(520년)에 실제로 불상이 절벽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전해졌다. 정광원년이면 공현석굴의 개착 연대와도 유사한 시기여서, 공현석굴에서 이처럼 마애불이 조성된 이유 역시 서상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론을 해보았다. 나아가 골굴사 석굴 역시 석굴과 마애불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국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흔치 않기 때문에 공현석굴과의 유사성이 주목된다. 다만 그 순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조각양식적으로 보면 공현석굴에서는 마애불보다 석굴 내부의 중심석주에 조성된 불상들의 한화가 더 진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마애불이 먼저 조성되고, 이어 석굴사원이 개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골굴사 석굴의 경우는 이미 혈사(穴寺) 즉 석굴이 삼국말~통일신라초기에 활동했던 원효스님이 머물렀고 입적한 장소로 추정되고 있는데 반해 마애불은 통일신라 후기로 편년되고 있기 때문에 석굴이 먼저 운영되고 있었고, 마애불이 나중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번화현 서상도 불상의 출현이 예견된 이후 87년이 지나서 마애불이 출현한 예에서처럼 자연암반이 신성한 곳으로 숭상되고, 주변에 수행공간이 형성된 다음, 나중에 마애불이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그 순서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예상된다. 아마도 골굴사 정상부의 마애불과 그 아래 기암괴석의 석굴은 마치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장면처럼 바위에 현현한 부처와 그 주변에서 수행하는 오백나한의 이미지를 실제로 수행공간에 실현한 사례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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