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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미나 (원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1號
발행연도
2021.2
수록면
39 - 70 (32page)
DOI
10.14769/jkaahe.2021.02.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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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는 조선 태종~문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으로서 특히 세종조의 성세(盛世)에 관료를 지내면서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며 덕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는 문종 즉위 후에 예문관 직제학을 지내다가 노령을 이유로 사퇴하고 전라도 영암으로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최덕지 사후에 그의 초상화는 그의 강학처였던 존양루에 봉안되었고, 이후 사당과 서원의 건립이 이어져 이모본이 봉안되면서 후손 및 사림의 첨배 대상으로 존숭되었다.
최덕지 초상화는 조선시대의 사대부상 중 가장 이른 작품으로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영암 영보리 영당의 <최덕지상 정본>과 <유지초본>은 1975년 보물 제59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최덕지 초상은 영보리 영당에 2 점이 더 있고 임실 주암서원에도 1본이 있어 총 5점이지만 이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문헌을 통해 최덕지 초상화의 전승 내력을 살펴보고, 이어 현존하는 5점의 작품에 대한 양식 고찰을 행하였다.
먼저 최덕지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을 보면 직령(直領)의 청포를 걸치고 허리에 홍대(紅帶)를 둘렀는데 이는 고려 말의 유풍이 있는 공복(公服)에 해당되고, 머리에 착용한 관모(冠帽)는 일종의 오건(烏巾)으로 단추와 같은 돌기가 있는 독특한 규식인데 이는 사복(私服)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서안을 앞에 놓고 독서하는 선비의 모습을 표현한 도상이다. 이는 고위 관료를 지낸 최덕지의 위상을 드러낸 동시에 향리에 은거한 선비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표상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최덕지 초상화의 전승 내력을 살필 수 있는 곳으로 첫째, 최덕지가 중앙 관료직을 사임하고 은퇴하여 살았던 영암 영보 마을의 영당, 둘째, 영암의 사족이 힘을 모아 설립한 녹동서원(구 존양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원(현 임실)의 주암서원이다.
첫째 영암 영보리 영당은 최덕지가 거처했던 곳에 설립된 사당이다. 최덕지 초상화는 최덕지의 강학처였던 존양루에 봉안되다가 1578년(선조 11)에 사당 건립 후 사당의 영당에 봉안되었다. 정유재란 중에 이 사당은 소실되었으나, 초상화는 나주의 본손(本孫) 묘산에 매안(埋安)한 덕분에 온전하였다. 전란 후 1610년(광해 2)에 꺼내어 개장했고 이후 이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초상화는 1659년(현종 즉위년)에 다시 건립된 영당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영보리 영당에 총 3점의 최덕지 초상화 정본과 유지초본 1점이 있는데, 이 중 ‘궤장본’이 17세기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보리 영당본이라 여겨진다.
둘째 녹동서원은 본래 최덕지 향사(享祀)를 위해 1630년(인조 8)에 창건된 존양사(存養祠)에서 시작되었다. 1713년(숙종 39)에 사액되어 녹동서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이 때 최덕지 초상화 이모본을 제작하여 봉안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또 한 차례 이모하여 봉안하였다. 이후 녹동서원에는 1769년 제작본이 봉안되어 내려오다가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훼 때 영보리 영당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영보리 영당의 현존작 중 ‘보물 지정본’과 ‘유지초본’은 18세기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녹동서원의 1769년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셋째, 주암서원은 남원(현 임실)의 최덕지 후손들이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774년(영조 50)에 설립한 곳이다. 녹동서원의 1769년본을 토대로 이모본을 제작하여 주암서원 영당에 봉안하였다. 주암서원에 현존하는 <최덕지 초상화>는 양식에서도 18세기 말의 특징을 지닌 작품으로 기록과 부합된다.
한편, 영보리 영당에 현존하는 ‘신본’은 20세기 중반에 ‘궤장본’을 토대로 이모한 본이다. 당시 ‘궤장본’을 모본(母本)으로 삼았던 것은 그것이 영보리 영당에 원래 걸려있던 영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 문헌 자료와 현존 초상화의 양식을 검토하여 최덕지 초상화의 전승 내력을 알아보고 현존작에 대한 편년을 시도하였다. 최덕지 초상화는 초상화 양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던 1970년대에 보물로 지정된 이래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 검토 없이 지금까지 15세기의 원본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 연구에서 그동안 흑장궤에 담긴 채 잊혀졌던 ‘궤장본’과 기존에 주목되지 않았던 ‘주암 서원본’ 및 ‘신본’에 대한 조사를 하여 최덕지 초상화 현존작 5 점에 대한 편년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최덕지의 은거와 영암 사족의 형성
Ⅲ. 최덕지 초상화의 전승 내력
Ⅳ. 최덕지 초상화의 도상과 양식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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