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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윤상 (창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77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37 - 82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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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에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李容翊은 광산 개발과 勢道家 출입을 통해서 1882년 말단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 해에는 일약 端川府使에 임명되면서 벼락출세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함경도와 평안도의 여러 지방관을 지내는 동안 자신의 장기를 살려 鑛務監理를 겸하면서 많은 금을 바침으로써 고종의 신뢰를 쌓아간 듯하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권력을 강화하는 1897년에는 화폐 주조를 담당하는 典圜局長이 되어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1899년에는 황실재산을 총괄하는 內藏院卿, 1900년에는 정부재정을 담당하는 度支部 協辦에 올랐고, 이후 고종의 총애와 비호를 배경으로 이 세 관직을 겸직하거나 오가면서 황실과 정부의 재정을 한 손에 쥐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의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돌아온 그는 軍部 大臣에 오르는 등 잠시 권력에 복귀하는 듯했지만 일본의 강력한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마저도 이번에는 그를 지켜줄 수 없었고, 결국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대한제국시기 그의 활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고종의 권력 강화를 위한 황실재정의 확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직선적인 업무추진 방식과 지나친 강경책의 동원, 과도한 조세 징수는 정부 대신들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민간의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용익에게 국가 경영이나 재정 운영에 필요한 경륜이나 안목은 부족했던 것 같다. 특히 그의 경제와 화폐에 대한 인식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대부분의 조롱거리가 될 정도였으며, ‘帑需’를 명분으로 황실재정의 확충에만 치중한 것도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실의 확보 없이 열강의 도움에만 의존하려는 그의 국제사회와 자주독립에 대한 인식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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