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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상열 (한림대학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1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73 - 96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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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연맹적인 모습으로 출발한 고조선은 이윽고 ‘조선’과 ‘조선왕’을 맹주로 하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었고, ‘제후적 존재’를 시사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데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만조선의 관직체계를 살펴보면 다분히 자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연맹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주변 지역의 半독립적인 首長이 국왕 아래 결집하여 국정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이 늦어도 서기전 4세기에 당시 지상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의 ‘王’이라는 稱號를 썼다는 것은 고조선의 지배자가 바야흐로 예맥세력의 실질적인 盟主가 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늦어도 衛滿朝鮮期에 이르면 고조선은 주변의 半독립세력을 아우르는 형식을 갖추고 ‘중심국가’ 의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의 중심의식은 단군신화를 통해 더욱 발현되었는데, 단군신화에는 당대 고조선 지배층이 갖고 있던 天孫族 의식을 담고 있다. 또한 단군신화를 통해 고조선 지배층의 세계관은 지상 아래 온 세상이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고조선이 중심의식을 넘어 천하관을 지향했음을 알려준다. 서기전 4세기 말 고조선의 칭왕은 기존의 왕칭인 ‘왕검’을 계승한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고조선이 예맥공동체의 독자적 세력권 구축을 넘어 중국까지 포함한 세계의 패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위만조선 초기에 잠시 이러한 천하관이 제약을 받았지만 우거왕 때에 이르러 다시 원상복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우거왕대에 달라진 천하관 모습은 분명 朝漢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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