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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규희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17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8 - 89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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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고려 말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유람해 보고 싶은 최고의 경관을 지닌 산이었을 뿐 아니라 불교 성지로 이웃 국가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진 명산이었다. 그런데 중종 말년 이후 16세기 후반 동안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반면 이 시기에는 안동 지방의 작은 산인 청량산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꼭 한 번 탐방하고 싶은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청량산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풍기군수로 재직 중이던 주세붕이 1544년에 지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을 통해서였다. 그가 이 글을 저술한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천년 동안 적막하게 명성 없던 이 산을 예안 출신의 영남 성리학자들을 낳은 특별한 산수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이 산 곳곳의 지명을 새롭게 고쳐, 불교적 자취 일색이던 이 산을 성리학의 성산으로 전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청량산을 주목한 것은 풍기를 안향 이래 성리학자들의 본거지로 만든 백운동서원의 건립 의도와 상통한 것이었다. 이 시기 영남 사림의 청량산 유람은 당시 심화되던 성리학 운동의 흐름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 후반 이후, 김창흡 형제에 의해 금강산의 수려함이 문학과 예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새롭게 조명된 것도 ‘산수미 구성’이란 맥락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까? 18세기 서울의 진보적인 학풍과 문예의 흐름을 주도하였던 김창흡이 후학들에게 전한 가르침은 “시는 명산과 대천에 있다.”는 것이었다. 김창흡은 진정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직접 산천을 탐방하여 산수의 진면목을 보고 그곳에서 느낀 감흥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명산은 금강산이었다. 시가 ‘명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가장 뛰어난 시는 결국 ‘금강산’에서 나와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산 유람의 경유지인 포천과 가평, 철원 일대는 흥미롭게도 이들 장동(안동) 김씨 일족이 개간을 통하여 마련한 경제적 기반인 외포(外圃)였다. 이황이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吾家山)’으로 칭했던 맥락처럼 금강산도 이들에게는 ‘우리 집안의 산’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창흡은 금강산을 일곱 번이나 탐방하며, 유람할 때마다 새롭게 접하게 되는 금강산의 진면목을 시에서 강조하였다. 이것은 김창흡 문하의 후학들에게 산수 경관을 핍진하게 묘사하는 ‘그림’ 같은 시에 대한 열망을 낳았다. 이들에게 정선의 그림은 산수의 생생한 모습을 기억하고, 또 그 장면을 시로 읊는 데 도움이 되는 매체였다. 김창흡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금강산 유람과 산수시의 새로운 경지 개척, 그리고 정선이 새롭게 창출한 산수화법은 모두 동가(同價)의 의미를 갖는 담론이었다. 정선의 산수화는 시와 함께 감상하는 그림으로 여겨졌다. 이후 금강산은 서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생에 꼭 한 번은 유람하고 싶은 최고의 산수 경관이 되었다. 이렇게 산수는 인간이 추구하고 개입하고 투사한 문명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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