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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태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2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89 - 112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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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664년 3월에 일어난 사비산성 전투를 중심으로 웅진도독부의 백제부흥운동을 새롭게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서 필자가 구분한 백제부흥운동의 시기구분을 따른다면, 사비산성전투는 전기 부흥운동의 마지막 전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후기 부흥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였음을 알려준다. 전기 부흥운동의 진압에 협조한 백제유민들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그 주체나 성격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로 끌려간 부여융을 비롯한 백제유민들의 협력과 참여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663년 11월의 임존성 전투가 전기 백제부흥운동에서 후기 백제부흥운동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임존성 함락이후 웅령 회맹이 맺어지면서 부여융을 비롯한 백제유민들의 바람은 당나라가 제의하였고, 자기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웅령 회맹이 이루어졌고, 부여융이 다시 당나라로 소환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은 사비산성 전투를 일으켜서 자신들의 당나라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 및 왜와의 연결 속에서 고구려 침공을 재개하였다. 이와 같이 당나라는 국제관계를 새롭게 변화시켜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 부여융이 마침내 웅진도독이 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백제유민들은 그와 함께 웅진도독부를 통해서 백제의 부흥을 다시 시도해보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664년 2월 웅령 회맹 이후 10월에 이르러 부여융의 웅진도독 임명을 요청하는 상소문이 올라가는 무렵까지 매우 긴박하게 움직여져 간 동아시아의 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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