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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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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부고고학회 고고학 고고학 제10권 제2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01 - 13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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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남한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멸망하기 전까지 많은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475년 백제의 한성 점령을 계기로 본격화 되는 고구려의 남진은 몽촌토성을 기점으로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금강 유역의 목책 방어 단계의관방 유적과 한강에서 금강 사이의 육상 교통로를 따라 소규모로 존재하고 있는 고구려 석실분을 들 수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는 점열문, 파상문 등과 같은 문양이 시문되어 있거나 표면에 타날 흔적이 남아있는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강원도 일대에서도 고분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적이 일부 발견되었으나, 성곽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6세기에 들어 백제의 세력이 재정비되자 고구려는 금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한강북안의 아차산 보루군은 이제 목책에서 석축 성벽으로 방어 체계를 전환하게 된다. 많은 보루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아차산 보루군은 단순한 감시 기능을 담당하는 보루들의 집합군이라기 보다는 행정 및군사를 모두 담당할 수 있는 일종의 대형 성곽으로써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는 임진 한탄강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게되는데, 해당 시기에는 임진강 유역의 관방유적 또한 아차산 보루군과 마찬가지로 이미 목책에서 석축 성벽 단계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에서는 와당을 갖춘 기와 건물지가 들어선 호로고루가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특히 백제 지역에서는 고구려계 토기가제작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 중에서도 사비기 고구려계 백제 토기는 제작 시점이 6세기임에도불구하고 5세기대 고구려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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