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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식 (인제대학교)
저널정보
동아시아고대학회 동아시아고대학 동아시아고대학 제18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27 - 5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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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고대의 키비(吉備)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과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몇 가지를 검토한 것이다. 키비와 가야의 정치적 교섭은 ‘吉備反乱伝承’이 전하는 야마토정권의 키비 통합을 전후로, 5세기 전반까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造山ㆍ作山古墳의 주인공이 가야와 독자적인 교섭을 추진하던 단계와, 키비의 외교교섭권이 야마토 정권에 흡수되는 5세기 후반 이후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欽明紀」에 任那日本府로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 등은 왜에서 가야에 파견되었던 사신으로, 5세기 후반 이후 야마토 정권에 의해 좌우되던 키비와 가야의 지역적 교섭을 보여주는 것이며, 「応神ㆍ雄略紀」에 보이는 韓계통, 특히 가야계 집단의 이주와 정착에 관한 전승 등은 그 이전의 인적 물적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가야계 도래문화의 흔적에 대해서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 키노죠(鬼ノ城)의 우라(溫羅)전승, 貨泉 鐵生産 부뚜막(竈) 등에 주목하였다. 키비지역에 남아있는 고대의 지명 인명 씨족명에는 가야의 명칭 ‘가야’와 ‘아야’로 읽혀지는 것이 아주 많다. 가야 관련의 고고자료에 비추어 남는 자료만으로 키비와 가야의 교류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서기 9년 중국의 新왕조가 주조했던 貨泉이 가야와 키비에서 출토되고 있다. 화천은 1~3세기경의 전기가야 시기에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김해의 구야국을 거쳐, 왜국에 이르는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보여주고 있다. 빗츄(備中)의 가야씨(加夜氏)와 빈고(備後)의 아나씨(穴)는 가야계 씨족으로, 8세기경까지 키비지역을 지배하던 씨족집단이었다. 특히 가야씨는 키비씨의 본가이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 아시모리하치만신사(葦守八幡神社=葦守宮) 정문(鳥居)에 새겨진 명문을 제시하여, 14세기 중엽까지 가야씨가 키비 중심씨족의 하나였음을 밝혔다. 가야군(賀陽郡)군 중심에 존재하는 키노죠(鬼ノ城)에는 가락국(김해)의 건국신화와 흡사한 우라(溫羅)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변신하는 동물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쫓기는 세력(키비의 우라와 가야의 탈해)과 쫓는 세력(키비의 키비츠히코와 가야의 수로)의 대결구도와 변신의 패턴은 같은 꼴이다. 고대의 키비가 철의 선진지역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로, 그 시작에 철의 왕국 가야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중요한 전제로 되었음에 대해 목간과 『일본서기』와 같은 문자기록과 고고자료를 제시하여 논증하였다. 끝으로 키비에서 검출되는 5세기 중엽 이전의 부뚜막은 가야계 이주민의 사용과 신앙 활동의 흔적으로 판단하였다. 쏘우자시(總社市)의 오기야쿠시유적(窪木藥師遺跡)의 고정식 부뚜막은 『三國志』가 전하는 변진=전기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통하는 것으로, 김해 부원동유적과 진주 평거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것과 동일하고, 폐기의례에 사용되었던 鐵鋌과 鐵钃은 동래 복천동고분군 출토품과 같은 것이다. 김해 부원동유적에서는 부뚜막 근처에서 卜骨과 4세기 전반의 산인계(山陰系) 하지키(土師器)가 출토되고 있다. 가야의 부뚜막신앙과 키비에 인접한 산인지역과의 교류가 아울러 확인되고 있다. 가야인들이 부뚜막과 부뚜막신앙을 가지고 키비지역에 이주했던 흔적은 키비츠신사(吉備津神社)와 ‘가마솥님(お釜殿)’, 그리고 ‘울리는 부뚜막제사’에서도 확인된다. 키비츠신사에서는 가야의 건국신화와 같은 변신경쟁의 주인공 키비츠히코(吉備津彦)가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우라(溫羅)의 머리는 숭배대상의 ‘가마솥님’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키비츠신사 역시 에도시대까지 가야씨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신사의 북쪽에는 지금도 카라천(辛=加羅川)이 흐르고 있어, 가야계 이주민들의 흔적으로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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