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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9호
발행연도
2023.3
수록면
275 - 311 (37page)
DOI
10.37331/JKAH.2023.3.109.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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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榮留王代 추진된 對唐外交와 대당방어체제의 내용에 대해 검토하고, 645년 전쟁으로 이어진 전개과정과 그 성과를 살피기 위해 마련되었다.
고구려는 隋의 침공과 같은 위기를 또 다시 겪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밀도 높은 대당외교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이 적대감을 드러냄에 따라 고구려의 위기의식은 커져갔고, 당이 수와 같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쟁 발발의 가능성도 높아져 갔다. 고구려는 그 시기를 늦추고자 당의 會盟 요구를 수용하거나 封域圖를 헌상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대당외교를 통해 對隋 전쟁의 상흔을 수습하고 침략에 대비할 여력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631년부터 고구려는 대당외교를 중단하고 당의 침입에 대비하는 방어체제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646년까지 16년 동안 고구려가 전력을 쏟았던 이 大役事는 대수 전쟁의 경험을 토대로 성곽에 의지한 방어전술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대역사는 645년의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戰後 고구려가 공사를 재개하여 이를 마쳤다는 것은 이 방어체제가 실전에서 당군을 상대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으로 遼西 동부지역을 상실한 바 있었다. 이러한 변경의 후퇴와 관련하여 遼河線에 대한 방비가 필요하였다. 요하에서 玄菟城까지의 경로에 늘어서 있던 烽燧와 城堡들이 그 대비책의 일환이었다. 瀋陽 石臺子山城에서 확인된 성벽의 보강 작업은 대당방어선을 구성한 성곽들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공사의 실례가 된다. 기존 성곽의 보강과 함께 새로운 축성도 병행되었다. 莊河 城山山城과 後성산산성 등의 사례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대대적인 방어선의 정비와 함께 최전선으로부터 후방에 위치한 지역에까지 대규모 토목공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관할 지역의 주민과 糧穀 등 물자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대당방어체제는 최전선뿐 아니라 그 후방의 일정 지역까지 방어시설의 보강과 入保處를 세우는 전면적인 방어망이었다. 16년 간의 장기적이고도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했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645년 전쟁에서 당군은 전격적인 기습으로 遼東城·蓋牟城 등을 함락하였지만, 개전한지 석 달이 지난 시점에도 그 작전 범위는 요동 서북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平壤 방면으로 남진했어야 할 평양 공략군이 요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당군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요동 일대에 구축해 둔 방어체제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예정된 전쟁과 對唐外交
III. 千里長城 축조와 對唐防禦體制의 수립
IV. 645년 당의 침공과 安市城 전투
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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