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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은영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58호
발행연도
2015.5
수록면
223 - 25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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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 천평승보6년(754) 정월조에는 752년에 견당사로 파견되었던 견당부사 오오토모노 스쿠네 고마로(大伴宿禰古麻呂)가 당으로부터 귀환하여 상주한 내용이 실려 있다. 大伴古麻呂에 따르면, 天寶12載(753) 1월 1일 당 현종이 봉래궁 함원전에서 당조정의 관료들과 외국 사신들로부터 하례를 받는 조하의식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이날 조하의례의 석차가 일본이 서반에서 제1위인 토반의 다음이고, 신라는 동반의 제1위로 대식국보다 위에 있었다. 이에 古麻呂가 예부터 신라는 대일본국에 조공을 해온 나라인데 지금 동반의 상위를 차지하였음에도 일본은 오히려 그 아래에 있으니 이는 의리에 부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불만을 제기하였다. 이때 당 장군 오회실이 古麻呂의 납득하지 못하는 안색을 살피고, 신라사를 데려다 서반의 토번 아래에 두고, 일본사를 동반 대식국의 위인 제1위의 자리에 두었다고 한다. 大伴古麻呂에 의해 전해진 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무대에서의 일본의 외교적 승리는 고대 일본이 ‘동이의 소제국’이었다는 근간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大伴古麻呂 주언의 내용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그 사실성에 대해 살펴보면, 大伴古麻呂의 주언에는 사실과 과장이 혼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일본 사신인 大伴古麻呂가 신라와 일본의 석차문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당 측에 전달된 것도 사실이지만, 大伴古麻呂가 주장한 바와 같이 석차변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大伴古麻呂로 하여금 일본 조정에 석차변경을 보고하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大伴古麻呂 주언의 진의는 大伴古麻呂라는 한 인물과 당시 일본 조정안에서 大伴古麻呂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천평승보2년 9월에 임명되어 천평승보4년에 파견된 견당사는 동대사 대불조영을 앞두고 이루어진 橘諸兄정권의 사업이었다. 橘諸兄정권의 주목해야 할 특징은 이전의 후지와라 사형제정권과 달리 皇親․舊族이 중심이 된 정권이라는 점이고, 이번 견당사 임무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던 부사 大伴古麻呂가 橘諸兄系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大伴古麻呂가 일본에 귀환했을 때는 藤原仲麻呂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탄생하였고, 당연한 일이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다른 대신라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大伴古麻呂는 선회된 조정의 대외정책에 편승하여 강경한 대신라정책을 주장하게 되었고, 그 예로서 당 봉래궁 함원전에서 있었던 조그마한 불만사항을 신라와 일본 간의 외교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주장한 것이었다. 大伴古麻呂는 橘諸兄系의 세력이 약해진 이후, 견당 부사를 역임했던 경험을 살려 대외정책에 대한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橘諸兄세력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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