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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봉곤 (순천대학교)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26호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63 - 10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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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호남지역 최초로 동학이 전파되고, 1894년 동학농민군이 혁명의 핵심 기지로 삼은 지역이었다. 본고는 이러한 남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기간 중 주로 사족의 대응에 관해 살펴본 것이다. 남원은 1864년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되면서 동학의 맥이 끊기게 되었으나, 1880년 후반 남원 둔덕의 김홍기(金洪基) 등의 노력에 의해 다시 동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1891년 무렵에는 교도수가 크게 늘어 1892 삼례집회, 1893년 복합상소, 보은집회, 금구집회 등 각종 집회에 참여하였다. 동학교도 수가 크게 증가하고 활동이 활발해지자, 남원지역 사족들은 동학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변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김택주(金澤柱) 등은 1893년 1월 서울에서 호남 지역의 동학배척상소를 주도하였으며, 동학의 전파를 막기 위해 마을마다 실시된 향약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개남(金開男) 등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1894년 6월 25일 남원성이 함락되고, 남원지역은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중심지가 되면서 7월 중순 수 만 명이 집결하기도 하였다. 8월 19일 이후 운봉의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과 맞서기 위해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은 9월 이후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남원과 담양을 비롯한 구례, 태인, 임실 등 전라좌도 지역에서 각종 식량과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10월 14일에는 남원을 떠나 출병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맞서지 못하여 실패하였고, 남원지역 역시 운봉의 박봉양(朴鳳陽)의 민보군(民堡軍)에 패배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남원의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사족들은 부호의 경우는 많은 재산을 빼앗겼으나, 학덕이 있는 사족들은 별다른 피해를 겪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은 혁명의 수행을 위해서 향촌사회 지식인인 유생들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생들 역시 대부분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봉기한 것에 대해서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난을 일으킨 역도로 규정된 데다가 박봉양의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이 우세를 보이자, 사족들은 박봉양의 민보군과 연합하여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남원지역은 민보군에 의해 일부 사족을 제외하고는 평민, 노비들이 주로 희생을 당하였으며, 사족들은 일본군의 남원 진출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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