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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미술사학연구회 미술사학보 미술사학보 제26호
발행연도
2006.6
수록면
5 - 3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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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만을 모시기 위해서 세워진 진전(眞殿)이다. 태조 진전은 조선전기부터 전국 각지 다섯 곳 이상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남한에는 경기전(慶基殿)만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걸쳐 왕의 초상, 곧 어진(御眞)은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특히 태조 어진은 기록에 26축이나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자세와 복식으로 다량 그려졌으나 현재 경기전본 태조 어진만을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경기전은 봉안대상과 봉안처가 함께 보존되고 있어서 그 역사적, 미술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다. 본고에서는 “왕의 초상” 특별전을 진행하며 도출한 여러 성과를 바탕으로 태조 어진과 봉안 상황에 대한 현상파악을 염두에 두면서 그 조형적 특징과 봉안의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그 규모나 재료, 안료, 표현기법, 장황상태 등 여러 면에서 왕명으로 시행된 조직적 회화제작의 공정을 반영해 주는 작품이다. 현존하는 어진 중에서 조선시대 어진의 진면목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경기전 태조 어진의 형식 및 표현기법 등을 볼 때에 현존 경기전의 태조 어진이 1872년에 이모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자세 및 도상을 의도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경기전본 태조 어진의 청색 복색, 정면상이라는 조형 요소는 조선전기 고식적 전통의 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 어진이 경기전에 봉안된 상황을 검토해보면 첫째, 어진을 외부와 차단하여 보위하는 장치를 많이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태조 어진은 외부에 공개되는 측면보다는 엄중히 모셔지는 방향으로 그 봉안과 관리의 절차가 정교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마치 어진 자체가 임금인 것처럼 어진을 모신 장소를 ‘침실’이라 칭하고 어진의 보호와 관리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진을 이안하거나 이동할 때에도 장대한 규모와 엄중한 절차의 의식과정을 지켜 시행하였다. 셋째, 침실 내의 벽화 장식이나 일월병 및 3중 바닥깔개의 설치 등을 보면 침실을 꾸밀 때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고려하기 보다는 어진 자체를 중심에 두고 어진의 관점에서 침실 안을 조성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최고급의 재료와 공력으로 화려하게 제작된 태조 어진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태조 어진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농민혁명 등 여러 차례의 긴급한 상황을 맞아 갑작스러운 이동을 수차례 거치면서 대부분의 어진이 망실된 상황에서 태조 어진은 온전히 보전되어 그 신성화는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이러한 봉안상황에 대한 이해는 조선시대 어진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이며, 현재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봉안처인 경기전과의 관련성 없이 초상화의 맥락에서만 연구한다면 태조어진의 복합적인 의미를 놓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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