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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洪誾 (中國黑龍江大學)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65輯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381 - 412 (32page)
DOI
10.52639/JEAH.2023.12.6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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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인조 시기 정경세의 제자인 홍호를 중심으로 영남 남인들의 현실 인식과 이에 대한 대응책을 살펴본 뒤 함께 국정을 주도했던 서인과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밝혔다. 인조 시기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이 남인과 손을 잡고서 국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양자가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특정한 사안의 처리나 현실 인식 및 대응책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먼저 남인들은 광해군 시기 국정을 주도한 북인에 대해 선별적 처벌을 주장했다. 논란의 중심은 인조반정 때 자결한 박승종에 대한 평가의 문제였다. 홍호는 서인들과 달리 박승종의 행위를 대의명분의 입장에서 충을 다한 것으로 보았다. 다음은 인조가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당시 남인과 서인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남인은 당시 가졌던 철저한 종법 시행과 종통 중시의 입장을 뒷날 세자와 세손 책봉이나 예송 때 철저하고 일관되게 견지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현실 인식과 대응에 있어서 차이가 나타났다. 당시 후금에 대한 주전론과 주화론, 그리고 주전론도 현실론적 주전론과 숭명사대론적 주전론으로 갈라졌다.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하고 명이 패망한 가운데에도 조선은 숭명사대론적 주전론자들이 정권을 주도하며 반청의 기류 아래 북벌론으로 이어갔다. 당시 영남 남인은 서인 집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숭명사대론에 따라 친명 정책에 동조하였지만, 후금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현실론적 주전론의 입장을 가졌다. 이에 따라 남인은 국방정책에서도 포수 양성과 무관들의 적극적 등용을 통한 지방군의 강화를 주장하는 등 보다 현실적 대응책을 내놓지만, 서인은 이괄의 난 여파로 국방력 강화에 남인들보다 소극적 자세를 보였으며 중앙군 강화의 방안을 채택하였다. 군비 확충과 직결된 당시 호패법과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서는 중앙 관료로 진출해있던 남인들은 서인들과 같이 찬성하는 입장에 섰다.
남인과 서인은 인조 이후 효종을 거쳐 현종 때 이르면 정치적으로 충돌하며 본격적인 당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쟁의 발생이 좁게 보면 당시에 발생한 예송이나 이와 연관된 당대의 정쟁일 수 있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이미 인조 시기에 양측은 서로 다른 현실 인식과 대응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조 시기에는 양자 간의 차이가 잠복해 있다가, 현종 시기에 이르면 마침내 이것이 밖으로 크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북인 처벌과 인조의 원종 추숭에 대한 입장
Ⅲ. 대외 인식과 정책
Ⅳ. 국방정책과 군비 관련 경세론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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