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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변성호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23권 제1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91 - 123 (33page)
DOI
10.35161/rkapt.2024.03.2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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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촛불혁명’과 2019년 3.1운동 100주년은 ‘3.1혁명’에 대한 관심을 재생시켰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부터 ‘3.1혁명’으로 지칭되었다. ‘3.1혁명’론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포괄적인 평가를 위해서 3.1운동 이전과 이후의 다른 혁명 담론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제국권력의 감시로 인해 직접적인 혁명 논의는 불가능하였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각지의 혁명 담론을 활발하게 흡수하여 활용하였다. 미국 한인들은 임시정부로서 무형국가, 가정부를 모색했고,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은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일본 유학생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에 3.1운동을 혁명으로 파악한 한국인이 일부 있었고, 중국 지역의 한인은 적극적으로 3.1운동을 혁명이라 주장하였다. 3.1운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가 수용되어, 사회주의자는 폭력혁명을 내세웠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을 주장했고, 조소앙은 3.1운동을 ‘혈전’으로 인식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심의 폭력적인 혁명 담론을 전개했다. 3.1운동의 실패와 전간기 국제사회의 이상주의에 대한 회의로 일제강점기에 폭력적 혁명 담론이 우세하였다.

목차

국문 요약
Ⅰ. 서론
Ⅱ. 3.1운동까지의 혁명 담론
Ⅲ. 3.1운동 이후 주요 혁명 담론
Ⅵ.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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