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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영관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60호
발행연도
2024.4
수록면
171 - 19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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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년 일어난 관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이고 가야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다. 지금까지 관산성 전투에 대한 연구는 전장의 위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성왕의 전사와 백제군의 참패 등에 집중되었다. 반면에 백제가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어떻게 군사를 모았고, 어떻게 운용했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이에 백제와 가야, 왜로 구성된 백제연합군의 형성과 편성, 규모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백제군은 관산성 전투에 앞서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백합야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가야 · 왜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왜에는 무려 5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고, 청병한 지 2년 1개월 만에 파병을 받을 수 있었다.
가야연맹체와 백제는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격변으로 적극적인 군사협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대가야를 중심으로 군사적 지원을 받아내 관산성 전투 직전인 554년 6월에는 백제와 가야, 왜의 연합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관산성 전투에 참여한 백제연합군의 전체 규모는 3만 이상이었다. 왜군은 수군 1천 명, 가야군은 왜군이 보낸 병력보다는 많은 병력이 참전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중앙군과 5방의 방령군 등 가용한 전국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다. 백제연합군은 보병과 기병, 수군으로 이루어졌고, 태자 여창이 총사령관이 되었고, 4명 이상의 좌평과 5방의 방령이 군단을 이끌었다.
성왕이 직접 거느린 5천 명의 중앙군도 지원병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성왕이 구천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죽임을 당하자, 여창이 이끌던 본진도 무너져 병력을 거의 다 잃고 참패로 끝나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백제연합군의 구성
Ⅲ. 백제연합군의 규모
Ⅳ. 왜군과 가야군의 규모
Ⅴ. 백제군의 규모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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